탈옥 2년 신창원의 최근 행적 추적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8.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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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구미에 출현 ‘흔적’…검거 실패한 경찰들로 전담반 꾸려야
99년 1월20일이 되면 무기수 신창원(31)이 탈옥한 지 만 2년이 된다. 도대체 신창원은 어디에서 숨어지내기에 지난 7월16일 서울에 나타난 뒤 소식이 없는 것일까. 무속인 평택 할머니 진수복씨(67)는 ‘올해 엄동 설한에’, 안성 연보살 김순애씨(43)는 ‘올해 동지 섣달에’ 신창원이 잡힐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엄동 설한의 출발인 동짓달은 98년 12월19일부터 시작된다. 무속인들의 예언처럼 신창원이 운을 다한 것일까. 서울 출현 전후 신창원의 행적을 추적해 본다.

98년 10월14일 밤 산업 도시인 경북 구미시 일대에는 밤새 가을비가 내렸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25평짜리 서민용 ㅅ아파트 5동 702호에는 김지은양(가명·여고 1년생) 가족이 살고 있다.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김양은 잠귀가 밝은 편이다. 부엌 옆방에서 자고 있던 김양은 10월15일 새벽 4시쯤 조심스레 부엌을 걷는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깼다.

‘엄마가 아침 준비하시나 보다’라고 생각한 김양은, 누운 채로 엄마가 일어나라고 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 김양의 부모는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김양의 아버지 또한 잠귀가 밝다. 그때 안방문이 열리면서 바람이 ‘훅’ 들어오자, 아직 아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던 김양의 아버지가 놀라 일어나 ‘누구요’라고 소리쳤다.

배관 타고 아파트 6~15층 침입 도둑질

침입자는 얼른 안방문을 닫았다. 그 순간 자기 방문을 연 김양은 어둠 속이기는 하지만 플래시를 든 곱슬머리 사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내는 플래시로 김양을 슬쩍 비추더니 부엌 옆 보일러실로 사라졌다. 잠시 후 식구들이 일어나 불을 켜고 살펴보자 보일러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김양의 아버지는 낚시를 아주 좋아해 이 집 싱크대에는 회 뜨는 칼이 있었다. 이 날 없어진 것은 회칼뿐이었다. 날이 밝자 5동 전체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한 층에 두 가구씩 있는 15층짜리 이 아파트에서, 보일러실 창문을 잠그지 않은 6층~15층의 모든 세대에 도둑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둑이 든 집에서는 하나같이 싱크대에 둔 부엌칼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배관 밑 지상에는 도둑이 배관을 타고 다닐 때 벗겨진 페인트가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도둑은 배관을 타고 보일러실로 침입해 싱크대에 둔 부엌칼을 ‘호신용’으로 집어들고 도둑질을 한 것으로 보였다. 도둑질이 끝나면 부엌칼을 다시 싱크대에 두고 보일러실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범인은 면장갑을 끼고 있어 지문을 남기지 않았다.

구미경찰서는 비 오는 날 자유 자재로 배관을 타고 다닌 것으로 미루어 범인이 신창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김양에게 신창원 사진을 보여주었다. 김양은 한눈에 침입자와 매우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이날 이후 구미를 비롯한 경북 전체에 비상이 걸리고 검문 검색이 강화되었으나 신창원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북경찰청이 ㅅ아파트 절도 사건에 예민하게 대응한 것은 98년 봄 신창원이 구미·김천·성주·왜관·칠곡 일대에서 ‘놀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봄 성주·김천 일대 돌며 5명과 ‘연애’

지난 5월18일 신창원이 경북 성주군 초전면에 나타났다 사라지기 전까지 신창원은 초전면의 두 다방 종업원 신은경(30·가명) 박경희(29·가명) 양과 더블 데이트를 즐겼다. 성주에서 도주한 이후 신창원의 행적을 추적한 경북경찰청은, 신창원이 3월29일 구미시 ㄴ다방에 나타나 종업원 유인숙양(가명·16)에게 정장을 사주고 ‘연애’를 했으며, 성주에서 도망친 5월18일 마지막으로 유양을 만나고 간 사실을 확인했다. 또 4월11일 칠곡군 약목면 ㅅ다방 종업원 이용숙(가명·27)을 만나 14만원짜리 휴대폰을 사주며 데이트를 하고, 김천에서도 다방 종업원 김미숙양(가명)과 ‘연애’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성주와 칠곡·구미·김천은 차로 1시간 걸리는 ‘거기서 거기인’ 거리이다. 성주에서 달아나기 전까지 신창원은 진주에서 훔친 갤로퍼를 몰며 도둑질해서 마련한 돈으로 여자 5명과 방탕하게 ‘놀았던’ 것이다. 신창원이 경북에서 잠행할 때의 일이다. 어느날 신창원은 성주의 신은경을 갤로퍼에 태우고, 서울 마포의 홀리데이인 호텔 부근까지 올라가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는 2백만원을 주고 먼저 성주로 내려가라고 하고, 자신은 서울에 남아 도둑질을 했다.
다음날 신창원은 성주에 내려가 있는 신양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대구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김포로 오라’고 연락했다. 모처럼의 비행기 여행으로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진 신양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신창원은 곧바로 갤로퍼에 태워 성주로 내려가며 돈 자랑을 했다. 그리고는 김천 부근에서 ‘볼일이 있다’며 신양을 내리게 한 뒤, 김미숙양을 만나 데이트했다.

또 한번은 대구가 고향인 박경희에게 ‘대구에서는 어디가 부자 동네냐’라고 물었다. 박양이 수성구 쪽이라고 하자, 신창원은 ‘같이 돈 벌러 가자’며 박양을 갤로퍼에 태웠다. 수성구에 도착한 신창원은 ‘차에서 한잠 자고 있으라’고 해놓고, 2시간 뒤 6백여 만을 들고 나타났다. 성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신창원은 의기 양양하게 돈다발을 건네며 몇 장인지 세어 보라고 했다.

이러한 신창원은 박양이 변심하자 5월18일 경북 생활을 청산하고, 7월9일쯤 새 애인을 물색하기 위해 서울 영등포역 앞 사창가에 나타났다. 박영아양(가명·25)을 만난 신창원은 환심을 사기 위해 첫날밤은 그냥 보내고, 다음날부터 ‘긴 밤’을 끊어 내리 3일간 박양과 서울 시내에서 데이트하며 ‘사랑한다.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부동산 중개소를 통해 박양 앞으로 서울 양재동 구룡사 부근의 ㅇ빌라를 보증금 5백만원을 주고 월세로 계약한 뒤,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가전 제품 대리점에서 가전 제품 일습과 휴대폰을 사주었다. 살림 장만이 끝나자 신창원은 박양에게 훔친 수표를 바꿔 오는 심부름을 시킬 요량으로 주민등록증이 있느냐고 물었다. 박양이 ‘없다. 고향(청주)에 있다’고 하자, 고향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신창원도 닳고 닳은 ‘놈’이지만, 박양도 사창가를 돌아다니며 잔뼈가 굵은 ‘거센’ 여자였다. 신창원의 부탁을 받은 박양은 ㅇ빌라를 나와 용산에 있는 ‘서울 애인’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청주로 내려가 ‘청주 애인’과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는 청주 애인과 함께 정동진으로 해맞이 여행을 갔다. 그렇게 사흘을 신나게 놀고 나서 7월13일 박양이 ㅇ빌라로 돌아오자 신창원이 퉁퉁 부어 있었다.

돈과 사랑 타령으로 여자들 환심 사

박양은 신창원이 사준 휴대폰을 집에 놓아두고 청주에 다녀왔다. 신창원이 휴대폰의 검색 버튼을 눌러 박양이 건 전화번호를 모두 찾아낸 뒤 ‘누구를 만나고 왔느냐’고 따지자, 박양이 ‘그런 것을 왜 묻느냐’고 하면서 말싸움이 벌어졌다. ‘거센’ 박양은 ‘너 같은 놈하고는 같이 못살겠다’면서 집을 나가려 했다. 시골 다방 종업원과 달리 박양이 거세게 나오자 당황한 신창원은 현관문을 나서는 박양에게 ‘네 빚을 갚아 줄께. 계좌 번호 알려줘’라고 유혹했다. 박양에게는 빚이 1천3백만원 정도 있었다. 박양은 고향에 있는 동생 통장 계좌 번호를 불러주고는 휭하니 나가 버렸다.

빚까지 갚아 준다는데도 박양이 나가 버리자 신창원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랑하는 영아에게’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영아야. 사랑한다. 우리가 다시 함께 살 수 있다면 진짜 좋은 오빠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중략) 나는 널 이해하면서 내 인생을 너에게 맡기고 싶다. 마지막 날까지… (중략) 이틀 동안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어 술을 마셨다.’
자세히 보면 환심을 사기 위한 공허한 사랑 타령뿐인 이 편지를 남겨 놓고 신창원은 남은 돈을 넣어 둔 가방을 들고 ㅇ빌라를 나왔다. 이때부터 신창원은 박양이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듯, ㅇ빌라에서 직선 거리로 채 1㎞ 되지 않는 개포 4동 골목길에 세워둔 엔터프라이즈 승용차 안에서 지냈다. 이 승용차는 훔친 것이었다. 차 안에서 두 번째 밤을 보내던 날인 7월16일 새벽 마침 순찰 중이던 개포4 파출소의 엄 아무개 경장이 이 차를 발견하고 차적을 조회했다. 도난 차량임을 확인한 엄경장이 검문에 나섰다. ‘이 차는 내 차가 아니다. 옆 당구장 주인의 돈 심부름 왔다’라며 횡설 수설하던 신창원은, 엄경장에게 이끌려 당구장으로 가던 중 갑자기 덤벼들어 엄경장의 팔뚝과 귀를 결사적으로 물어뜯고 맨발로 달아났다.

‘주변 여자’ 신고 있어야 검거 가능

이날 오전부터 모든 언론이 신창원 서울 출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할 때쯤 박양이 ‘청주 애인’을 데리고 ㅇ빌라에 나타났다. 박양과 ‘청주 애인’은 가전 제품을 싸들고 유유히 청주로 내려갔다. 서울 경찰에 따르면 박양은 신창원을 ‘남자로서도 형편없었다’고 혹평했다. 시골 다방 아가씨의 환심을 사가며 은신에 성공했던 신창원이 서울에서 사창가 아가씨를 만나 완전히 ‘농락’당했던 것이다.

탈옥 이후 신창원이 만난 여자는 열 손가락이 넘는다. 이런 점 때문에 신창원의 여복(女福)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내면을 살펴보면 신창원의 삶은 여난(女難)의 연속이었다. 어떤 여자도 진심으로 신창원을 사랑하지 않았다. 탈옥 뒤 신창원이 처음으로 동거했던 전혜숙(가명·31)이 최근 다른 남자와 동거에 들어가는 등 하나씩 그를 버리고 있다.

신창원이 여자와의 동거에 집착하는 이유는 은신 때문이다. 신창원은 여자들 앞에서 돈 자랑을 하거나 의적 행세를 해 환심을 산 뒤 살림을 차려 은신해 왔다. 때문에 신창원을 검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여자들의 신고가 필수이다. 한 형사는 “신창원인 줄 알고도 숨겨 준 전 동거녀들을 범인 은닉죄로 잡아넣고, 신창원을 놓친 경찰관을 처벌할 것이 아니라 이런 경찰관들로 검거 전담반을 만들어야 검거가 빨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짜 ‘의적’ 신화를 벗겨내고, ‘잡범’ 신창원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신창원을 검거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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