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에서 천막 농성 벌이는 정치 수배자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8.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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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시절 정치 수배자들 조계사에서 천막 농성…“93년처럼 정치적 결단을”
서울 조계사에 가면 대웅전 처마 아래 천막들이 여럿 들어서 있다. 과거에 명동성당에 진을 쳤던 ‘사회적 약자’들이 요즘은 더러 대한 불교 조계종의 본산인 조계사를 찾기 때문에 벌어진 ‘낯선 풍경’이다. ‘김영삼 정권 시절 정치 수배자 수배 해제를 위한 조계사 농성단’이라는 긴 이름의 농성단이 진을 치고 있는 천막도 그 중 하나이다.

이 천막에서 기거하는 농성자는 9명. 모두 학생 시절의 활동과 관련해 길게는 6년, 짧게는 2년째 수배 중인 휴학생·제적생 들이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고 있는 기소 중지자라는 점이다. 여학생 1명을 빼고는 죄다 중처럼 머리를 빡빡 밀었다는 점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이들은 이 안에서 김영삼 시절에 수배된 67명(자체 집계)을 ‘대표’해 백일 넘게 농성 투쟁하고 있다.

이들이 조계사에 입사(入寺)한 때는 지난 8월 9일. 양심수에 대한 8·15 특사가 예상되는 때여서 ‘예비 양심수’에 해당하는 정치 수배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급조한 ‘기획 농성’이었다. 그런데 조계사에 농성 천막을 세운 지 어느덧 1백10일이 넘었다. “50년 만에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국민의 정부에서 농성이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다.” 농성단 단장을 맡고 있는 오창규씨(93년 전남대 학생회장·전남대 대학원 3학기)의 말이다.

농성 108일째 맞아 수배 해제 염원 3천배

그래서 이들은 오랜 농성으로 인한 고단함과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농성단 전원이 날마다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108배 용맹 정진하고 △6시에 대웅전 마당을 청소하고 △6시20분에 국선도를 수련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해 왔다. 9명 중에서 농성 중에 시집을 낸 유병문씨(동국대 불교학과 92년 입학)를 빼고는 모두 불자가 아니지만, 이들이 수배 해제를 염원하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행해 온 108배 용맹 정진은 조계사 스님들과 불자들 사이에 잔잔한 호응을 얻고 있다.

이들은 농성 기간에 수배자가족협의회를 구성하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정치권과 교섭해 ‘수배 해제’를 얻어낼 길을 모색하는 등 여러 모로 힘써 왔다. 그럼에도 수배자 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농성 108일째가 되는 11월24일 대웅전 처마 밑에서 수배 해제를 염원하는 3천배 의식을 가졌다. 이들은 이날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 대웅전 예불에 참석한 뒤 5시30분부터 의식을 시작했다. 이들은 5백배를 할 때마다 대웅전을 돌며 감긴 다리를 풀었고 오후 3시쯤에 3천배를 마쳤다. 땀으로 흠뻑 젖은 이들의 표정에는 오랜 수배 생활로 인한 고단함을 털어 버리는 후련함과 함께 반성의 빛도 묻어 있었다.

‘법대로’ 한다면야 3천배 아닌 3만배를 하더라도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수배자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한 전례가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나름으로 근거가 있다. 93년의 경험이 그것이다. 93년 이른바 문민 정부 출범을 앞두고 연세대에서 5·6공 정치 수배자 해제 요구 농성이 벌어졌고, 당국은 수배자 3백10여 명 가운데 3백8명을 기소 유예 및 불구속 기소하는 형식으로 수배자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현재 공안 사건 관련 수배자 문제의 최대 걸림돌은 한총련이다. 법무부가 국회 법사위에 제출한 ‘공안 사범(공안 관련 사범 포함) 수배자 현황’(96년∼98년 9월 말 현재)에 따르면,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 1백82명 △학원 사범 23명 △노동 관련 사범 23명 △기타 2명 등 수배자는 총 2백30명이다. 보안법 위반 사범이 전체 수배자의 80%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한총련 관련 사범이다. 이에 대해 현재까지 법무부가 밝힌 입장은 △자진 출두 △반성을 전제로 한 한총련 탈퇴 △수배 해제 이후 한총련 일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죄목에 따라 선별 처리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농성단은 93년처럼 전원 수배 해제 및 불구속 수사를 주장한다. 이들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12월5일부터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한다. 수배자가족협의회 역시 같은 날부터 국민회의 당사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할 예정이다. 실업자가 양산되어 가뜩이나 춥고 배고픈 겨울에 농성 천막이 더 늘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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