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언론재단 설립에 수백억 쾌척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5.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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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대우·쌍용 이어 삼성·LG도 언론재단 설립…언론의 질적 향상 계기 삼아야
재벌 기업이 언론에 수백억원씩 뭉칫돈을 내놓고 있다. 최근 들어 조건 없는 돈을 언론에 ‘쾌척한’ 기업은 삼성그룹과 LG그룹이다.

<중앙일보>와 소유 분리하겠다고 선언했던 삼성은 10월24일 자본금 2백억원 규모의 삼성언론재단 창립 총회를 갖고 이수성 서울대 총장을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LG그룹도 질세라 11월7일 구자경 명예회장의 아호를 딴 상남언론재단을 출범시켰다. 이사장에는 현직 언론인인 <조선일보> 안병훈 전무가 선출됐다. 자본금 규모는 백억원이다.

두 기업이 언론인과 언론 매체에 대해 각종 지원 사업을 펴는 재단을 세운 것은 갑작스런 일이 아니다.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이 소유했던 <중앙일보> 주식을 매각하기로 결정하면서 재단 창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삼성은 주식 매각 대금 백억원에 그룹내 각 계열사가 나눠 낸 백억원을 보태 재단 자본금을 마련했다. LG그룹도 지난 2월 구본무 회장이 취임하면서 “언론인에 대한 지원 사업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뒤 줄곧 준비 작업을 벌여 왔다.

“언론과 좋은 관계 유지하고 싶다”

이로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출연금으로 운영해 온 관훈클럽내 신영연구기금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출연한 서울언론재단을 합치면, 국내 4대 재벌이 저마다 언론재단 하나씩을 설립해 운영하게 된 셈이다. 이밖에도 올해로 30년째를 맞는 성곡언론문화재단도 재단 설립자인 고 김성곤씨(쌍용그룹 창업주)의 뜻에 따라 쌍용그룹이 지원금을 대고 있다.

대기업들은 왜 너도나도 언론인에 대한 지원 사업을 떠맡고 나서는 것일까. 이런 움직임은 우리 사회에서 언론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또한 막강해진 언론의 영향력 앞에 재벌 기업들이 ‘감시 대상’으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조바심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언론의 처지에서야 공짜로 공부시켜 주고 해외 연수도 시켜 주겠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기업의 처지는 조금 다르다. 밉보여서 좋을 것 없는 언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은 언론재단 관계자들도 시인하고 있는 바다. 바로 이 점이 언론재단을, 대기업이 운영하는 다른 공익 재단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언론재단 손창문 사무국장의 말은 시사적이다. 그는 “단기적으로 기업의 처지에서 어떤 성과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아무래도 (서울언론재단 기금으로 연수를 다녀온 언론인들이) 대우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서울언론재단의 지원으로 해외 연수를 다녀온 언론인들은 친목모임 격인 ‘남산클럽’을 만들어 1년에 두 번 정도씩 모이고 있다.
신생 언론재단이 구상하고 있는 사업 내용을 보면 야심차기까지 하다. 우선 자본금 규모부터 기존 언론재단과 큰 차이가 난다. 77년 1억원으로 출발해 18년이 지나서야 자본금이 91억원으로 늘어난 신영기금이나 자본금 31억원 규모인 서울언론재단에 비긴다면 삼성과 LG가 만드는 언론재단의 크기는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새로 선 언론재단들은 기존 재단들이 지원해 오던 해외 연수말고도 국내 대학에 펠로우십(fellowship)과 같은 언론인 연수 과정을 신설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수혜 대상도 다른 언론재단보다 넓혀 나갈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삼성언론재단 김두겸 사무국장(전 삼성경제연구소 이사)은 “일간 신문·방송 기자뿐만 아니라 잡지나 방송 프로듀서, 지방 언론 기자들에게도 연수 기회를 확대하자는 이사진의 의견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현재 재단 사업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언론인 해외 연수의 경우 1년짜리 위탁 교육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서울언론재단 연수생 10명이 석·박사 학위과정을 마친 것이 고작이었다. 연수 결과에 대한 검증 작업도 미진한 편이다. 신영기금의 경우 연수 결과물 제출 등 강제 규정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서울언론재단의 경우도 짤막한 리포트 1편씩만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돈 조금 대주면서 생색내는 식’의 부담을 당사자들에게 줄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통신의 비약적 발전으로 국경 개념이 점점 무너지고 있는 마당에 견문 넓히기 식의 해외 연수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연수 기간도 더 늘리고, 연구 과제를 구체화·전문화하는 방향으로 옮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 생겨날 언론재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재단이사 참여를 권유 받았던 서정우 교수(연세대·신문방송학)는 “대기업들이 언론재단을 만드는 목적은 기업의 이해를 언론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한 것으로 본다”고 전제한 뒤 “언론인 해외 연수의 경우는 선발 과정을 더욱 체계화하고 연수 과정을 철저히 감독해 연수 결과가 실제 기사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신문 기업들이 그 이익금을 언론의 질적 향상을 위한 일에 투자하기를 꺼리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기업의 참여는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우리 언론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데 이들 언론재단이 제구실을 할 것인지, 아니면 기업의 이해를 위한 ‘방탄복’으로 전락하게 될지 관심이 몰리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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