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담배 규제 말라" 미국의 주권 침해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5.08.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측 “한·미 양해각서 지켜라” 국회 통과한 국민건강증진법 보류 강요
94년 12월 대한민국 국회는 보건·복지 분야 시민단체들이 두 손 들어 환영할 만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른바‘국민건강증진법’이다. 이 법을 만든 목적은, 국민들이 건강에 대한 책임 의식을 함양하도록 국가가 바른 지식을 보급해, 건강 생활을 실천할 여건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새 법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부분은 술과 담배에 관한 조항이다. 국가가 국민의 기호품인 담배와 술의 판매·소비 문제에까지 정식 개입할 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한 예로 이 법에 따르면, 담배를 판매하는 사람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곳 이외의 어떤 장소에도 담배 자동판매기를 설치할 수 없다. 또 앞으로 주류 판매업자는 술병에‘과다한 음주는 건강에 해롭다’는 경고 문구를 반드시 표기해야 한다. 새 법의 취지는 말 그대로, 금연·절주에 대해서만큼은 국가가 확실하게 시어머니 노릇을 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이같은 국민건강증진법이 시행일(9월1일)을 보름 남짓 남겨둔 요즘 엉뚱한 곳에서 발목을 잡혀 허둥거리고 있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 맺은‘담배 시장 접근에 관한 한·미 양해각서’(양해각서)의 덫에 걸렸기 때문이다. 양해각서는 88년 한국 정부가 담배 시장을 개방할 무렵 교환됐다. 국민건강증진법이 양해각서의 덫에 걸리게 된 1차 원인은 새 법이 양해각서의 핵심 내용인 양담배의‘법적 지위’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관리망 벗어나 있는 양담배

애초 양해각서를 체결한 주요 목적은 양담배의 가격·담배세와 광고 및 판촉 행위의 원칙을 정해 양담배 수입·판매에 따른 양국간 마찰을 줄여 보자는 것이었다. 양해각서에 따르면, 양담배 수입업자는 모든 수입 담배의 수입 가격과 소매 가격을 정부로부터 간섭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결정한다. 또 한국 정부는 외국 담배 회사의 독립적인 판매 행위와 판촉 행위를 인정한다.

국민건강증진법은, 담배 판매를 국내산·국외산 구별 없이 금지하거나 제한함으로써 양담배의 법적 지위를 국내법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건사회부는 담배 제조회사 또는 수입 판매업자에 대해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담배 광고를 금지 또는 제한할 수 있고 미성년자에 대한 담배 판매를 금지할 수 있다. 담배 제조업자 또는 수입업자는 현재 연간 1백20회로 되어 있는 잡지 광고 횟수도 60회로 제한 받는다. 또 현재 담뱃갑 포장지 옆면에만 표시하도록 되어 있는 흡연 경고 문구도 앞뒷면 표시로 확대된다(도표 참조).

양해각서가 쟁점이 되기 시작한 때는 국민건강증진법안이 상정될 무렵인 지난해로 거슬러올라간다. 국민건강증진법 입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법안의 담배 관련 규정이 양해각서와 상충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양해각서 자체의‘불공정성’을 비판하는 국내 시민단체들의 목소리가 가세했다. 양해각서는 한국이 국내에서 수입 담배 판매·광고·판촉·가격 결정·세금 부과 등에 대해 미국측과 사전 협의 없이는 어떠한 형태의 정책적인 규제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문제는 이같은 배경에서 나온 한국 정부의 양해각서 개정 제안을 미국 정부가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서 빚어졌다. 현재 양해각서 협상에서 한국측 요구의 핵심은 담배세 부과 방식과 관련된 부분이다. 한국 정부가 종량제라는 과거의 세금 부과 방식을 종량·종가제 혼합식으로 바꾸자고 나섰기 때문이다. 미국측은 국산 담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이 비싼 양담배에 종가제가 적용될 경우, 자국의 담배 수출 회사들이 타격을 입을 것을 걱정해 한국측 요구를 거부해 왔다. 더 나아가 미국측은 한국 정부가 국민건강증진법을 시행할 경우 이를 양해각서 위반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 제17차 한·미 무역실무협의 때 한국측이 제기한 양해각서 개정 협상이 시일을 끌다가 지난 7월 말에야 겨우 열릴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이 회담에서도 미국측은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양해각서 협상에서 한국측 수석 대표로 나선 재정경제원 맹정주 국고국장은 “아직 협상 결과를 밝힐 시기가 아니다. 협상은 이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 계속하기로 약속되어 있다”라고 밝혀 워싱턴 협상에 별다른 성과가 없었음을 간접 시인했다.


건강증진법과 상충하는 양해각서 조항
한·미 양해록 건강증진법
담배 1갑당 4백60원 종량 소비세 부과 종가제 실시
흡연 경고 문구, 담뱃갑 옆면에 표시 앞뒷면 표시
연간 1백20회 잡지광고 및 소매점 담배 견본 판매 허용 연간 60회
사회·문화·체육 행사 후원 때 제품 광고 허용 ―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