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무덤, 청송감호소
  • 朴晟濬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1998.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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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관들, 집단 구타·가혹 행위 일삼아…인권운동사랑방, 출소자 증언 공개

“그때는 더위가 한창인 8월이었다. 밤 11시께 교도관이 호출해 불려간 뒤 다음 날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는데, 들것에 실려 나왔다. 주임들과 계장들, 부장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때렸다. 한 사람이 때리다가 지치면 다른 사람이 몽둥이를 이어받는 식이었다. 내가 혀를 깨물까 봐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머리에는 투구(계호 도구의 하나. 전면에 재갈을 물리게 고안했으며, 코로 숨쉴 수 있는 구멍만 작게 뚫어 관련 규정에도 3시간 이상 착용시키지 못하게 함)를 씌웠는데, 때리는 사람을 알아볼까 봐 투구를 돌려 놓았다. 4시간 가까이 그런 상태에서 온몸을 구타당하다 보니 아프기도 아팠지만,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96년 10월에 가출소한 윤 아무개씨(43)는 93년 8월 어느날 청송보호감호소(감호소)의 보안과 지하실에 끌려가 당한 일을 잊지 못한다. 윤씨는 87년 징역 3년·보호 감호 7년을 선고받고 청송교도소에서 3년을 복역한 뒤 청송감호소로 이감되었다. 집단 구타 사건이 발생할 무렵 윤씨는 교도관들의 부당·불법 행위에 사사건건 대들어 감호소측으로부터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상태였다.

윤씨는 일부 교도관이 담배를 몰래 들여다 재소자(감호소 안에서는‘감호생’으로 불림)에게 비싸게 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를 바깥에 알리려다가 들통이 나자 그것이 빌미가 되어 혹독한 구타를 당했던 것이다.

“교도소는 차라리 양반이다”

윤씨는 가출소할 때까지 앞서의 구타 사건말고도 굵직한 가혹 행위만 10여 차례 당했다. 지난해 11월 보호 감호 기간이 끝나 자유의 몸이 된 윤씨는 최근, 자신에게 가혹 행위를 일삼은 당시 소장(여광석)과 교도관들을 처벌해 달라며 검찰에 고소장을 냈다. 고소장에는 감호소측이 가혹 행위 관련 각종 공·사 문서를 변조했으니 진상을 밝혀 달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지난 5월7일 인권운동사랑방(대표 서준식)은 윤씨 등 감호소 재소자 출신들의 ‘한 맺힌’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시사저널〉을 비롯한 몇몇 언론에 전격 공개했다. 감호소의 인권 유린 상황이, 재소자 출신들의 자발적인 진술에 의해 책 한 권 분량의 증언집 형식으로 세상에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보다 앞서 ‘대도(大盜)’ 조세형씨는 자신에 대한 보호 감호 처분이 부당하다며 재심을 청구한 뒤 공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교도소측이 재소자들에게 가한 인권 유린 실태를 폭로했다. 조씨는 청송보호감호소와 같은 지역에 있는 청송교도소에서 복역했다(40쪽 상자 기사 참조). 15년 동안 독방에 수감되었던 조씨는 소송 대리 변호사의 입을 통해, 자신은 ‘15년간 파블로프의 개나 다름없이 생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권운동사랑방의 증언집에 따르면, 조씨의 수형 생활은 감호소에서 겪는 수감 생활에 비하면 말 그대로 ‘양반’이었다. 재소자 출신들은 감호소에 대해 ‘교도소가 아니지만 교도소보다 더 살벌하고, 사람이 거의 죽기 직전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걸어 나올 수 없는 곳’이라며 치를 떤다.

청송보호감호소는 어떤 곳이며, 그곳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재범 위험성이 있는 사람에 대해 특수한 교육·개선 및 치료를 함으로써 사회 복귀를 돕고 범죄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는 설립 목적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81년 12월 군사 정권이 삼청교육대 출신들을 강제 이감하면서 본격 가동하기 시작한 한국 유일의 보호감호 시설인 청송보호감호소. 이곳은 국내의 대표적인 두메로 손꼽히는 경북 청송군 광덕산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권 유린이 발생할 호조건을 갖추고 있다. 청송교도소 경비교도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송 아무개씨(현재 회사원)는 “다른 교도소에서 이감된 사람들은 대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얼굴빛이 사색이 된다. 험준한 산세와 지세에 눌려 자기도 모르게 겁을 집어먹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송씨는 “면회소에서 근무할 때 살펴보니 찾아오는 면회객은 하루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드물었다”라고 말한다.
정당한 권리 요구해도 징벌방 신세

감호소에서 재소자들이 금기로 여기며 경계하는 사항의 첫 번째는 교도관에게 대들거나, 잘못을 따지는 일이다. 비록 교도관이 행형 규정에 어긋나는 일을 저질렀더라도 시정을 요구하며 항의했다가는 자칫 짧게는 1주일에서부터 길게는 두 달 이상 징벌방(폐쇄 독방. 환기통과 식구통만 뚫어 놓았으며 크기는 0.95평 정도) 신세를 면치 못한다.

징벌은 보통 재소자와 교도관 사이의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된다. 이같은 시비는 때에 따라서는 재소자 처우 문제와 관련해 소장 면담을 요청하는 등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려다가 묵살당하면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아무리 항의 내용이 옳더라도 거의 예외 없이 항의 당사자에 대한 일방적인 징벌로 끝난다. 물론 징벌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잘잘못을 따지는 과정에는, 재소자에 대한 가혹 행위가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96년 가출소해 현재 사회에 나와 있는 ㅈ 씨(아직 감호 기간이 끝나지 않아 신분 노출을 꺼리고 있음)는 감호소에 있을 때 교도관에게 대들었다가 규정에도 없는 ‘4개월 독방 수감’이라는 장기 징벌을 받았다. ㅈ씨가 이같은 과중한 징벌을 받은 때는 91년 11월. ㅈ씨는 당시 이미 감호소측으로부터 2개월 독방 수감이라는 징벌을 받은 상태였다. ㅈ씨가 징벌 결정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서자, 감호소측은 ‘도둑놈 주제에 말이 많다’며 그를 자극했다. 이에 격분한 ㅈ씨가 징계위원들에게 욕을 퍼부으며 거칠게 항의하자 즉석에서 그에게 ‘징벌방 수감 2개월’이 추가되었다. 관규를 어긴 재소자는 모두 독방 수감이라는 징벌을 받는데, 그 기간은 보통은 길어야 두 달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일단 재소자 행위가 문제가 되어 조사가 시작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재소자는 온갖 계호 도구에 꽁꽁 묶이는 ‘통닭’ 신세가 된다. 밧줄에 몸이 묶이고, 손목에는 혁수정(일종의 가죽 수갑)에 수갑까지 채워지고(여기까지를 ‘시승시갑’이라 부름), 그것도 모자라 때때로 법에는 사용이 금지된 쇠사슬(연쇄라고 부름)이 동원된다. 완전 무결한 포박 상태는 징벌방 수감 기간 내내 계속되는데, ㅈ씨는 1주일에 딱 한번씩 목욕할 때를 제외하고는 4개월 내내 이 상태로 용변을 보고 식사를 했다(시승시갑 상태에서의 식사를 재소자들은 ‘개밥 먹는다’고 표현함). 또 다른 제소자 출신 ㅎ씨(무직)는 89년 한여름 이처럼 포박당한 것도 모자라 얼굴에 방독면까지 씌워진 채 감호소 마당의 농구대에 매달린 기억도 갖고 있다.

교도관의 부당 대우와 가혹한 징벌은 재소자들의 불만을 자극해 때때로 집단 난동을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87년 감호소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재소자 단식 사건이다. 재소자들은 이 사건을 사건이 발생한 날짜에서 이름을 따 ‘7·31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감호소측이 재소자의 감호소내 작업에 대한 대가인 근로보상금을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규정과 다르게 지급한 것이 발단이었다. 재소자들은 평상시에는 대부분 ‘출역’(작업장에 간다는 뜻)을 가는데, 감호소는 이에 대해 근로보상금을 지급한다. 사건이 발생할 무렵, 감호소측은 근로보상금을 1일 기준 최하 1천3백원으로 정해 놓았지만 실제로는 대개 5백원씩으로 계산했다. 게다가 재소자들은 행형 성적에 따라 우량수로 대접받게 되어 있었는데, 감호소측은 이를 무시했다. 참다 못한 재소자들은 마침내 작업장(공장이라고 부름)마다 연락을 취해 출역장 도착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단식에 돌입했다. 그러나 제2 감호소의 재소자 전원(당시 약 1천5백명)이 참여했던 집단 단식은 사흘 만에 감호소측의 강제 진압에 풍비박산이 났다. 단식 주모자들은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맞고 징벌방으로 보내졌다.

‘단식 사건’ 이후 다소 개선

집단 반발은 93년 5월에도 있었다. 이른바 ‘5·29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 재소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의 죽음이 감호소내 인권 유린 관행과 무관치 않다고 판단한 재소자들은 소장 면담을 요구하며 집단 단식에 돌입했는데, 감호소측이 가스총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서는 바람에 사태가 재소자 난동 상황으로까지 악화했다. 이 사건은 주모자들 중 3명이 추가로 5년씩 보호 감호 처분을 받는 등 관련자가 17명씩이나 처벌받은‘큰 사건’이었으나, 지금까지 바깥 세상에 그 전모는 물론이고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재소자들의 집단 행동 이후 재소자 처우는 부분적으로 개선되었다. 문제는 이같은 조처가 극히 제한적이며 일시적일 뿐이어서 시간이 흐르면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전과 3범이 넘는 ‘상습범’이라는 이유로 두 번에 걸쳐 10년 이상 감호소에 수감되었다가 지난해 9월 가출소한 김 아무개씨(무직)는 “나아진 것이 있다면 신문이나 잡지를 읽을 수 있게 허용하고, 필기 도구와 종이를 들여보내는 정도다. 이나마도 허락을 맡으려면 절차가 복잡해 글쓰기는 편지쓰기말고는 사실상 금지된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한다. 또 다른 출소자는 “우리보다 죄질이 훨씬 더 나쁜 조폭(조직 폭력배) 출신이 일부 교도관을 매수하거나 위협해 걸핏하면 출역에서 빠지고, 원무과 등 편의 시설도 제 마음대로 들락거리는 일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같은 일이 감호소내 가혹 행위 못지 않게 일반 재소자들의 불만을 부채질한다”라고 말한다.

청송보호감호소는‘보호 감호’ 요건을 규정한 사회보호법에 존립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법은 보호 감호의 기준으로 ‘재범 위험성’만 획일적으로 적용할 소지가 높다는 여론에 밀려 89년 관련 규정을 일부 완화하는 수준으로 개정되었다. 예컨대 ‘필요적 보호 감호’ 규정(일정 요건을 갖춘 자에 대해서는 징역형 외에 무조건 10년 또는 7년의 보호 감호가 따라 붙음)을 삭제하고, 7년 이하 범위 안에서 법관이 판단해 보호 감호 처분을 내리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보호 감호 대상이 되는 범죄도 대폭 축소했다.

문제는 이같은 조처에도 불구하고, 현행 법과 감호소가 ‘범죄 예방’과 ‘범죄로부터의 사회 보호’라는 법 취지를 여전히 충족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감호소 출신자의 재범률이 여전히 높고, 감호소내 사회 적응 훈련 역시 형식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인권 단체들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감호소 폐쇄’와 ‘사회보호법 폐지’를 강력히 주장한다. 특히 인권운동사랑방측은 아예 ‘청송 문제’를 올해의 주요 사업으로 설정해 증언집 발표에 이은 후속 작업 결과를 잇달아 내놓을 예정이다. ‘인권의 사각 지대’ 청송보호감호소의 존재 이유를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 더욱 뜨겁게 달아오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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