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끓어오르는 매향리의 분노
  • 고제규 기자(unjusa@e-sisa.co.kr) ()
  • 승인 2000.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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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미군 사격장 현장 취재/주민들 “국방부에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십자가를 앞세운 신부들이 7월10일 굳게 닫혀 있던 사격장 정문을 열어젖뜨렸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미국 공군 사격장(쿠니 사격장)은 지난 5월8일 농섬 폭격 사건 이후 시위대 접근을 막아 왔다. 한국 경찰은 물샐 틈 없이 철저하게 사격장을 둘러싸고 미군기지를 보호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7월10일 ‘SOFA 개정과 매향리 사격장 폐쇄를 위한 기도회’를 매향리 현지에서 가졌다. 마을 주민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여든 2백여명은 미사를 끝낸 뒤 십자가를 앞세우고 사격장 정문으로 향했다. 경찰은 신부들과 충돌을 피하려고 병력을 사격장 안으로 철수했다. 이 틈을 타 참석자들은 사격장 정문의 빗장을 풀었다. 1951년 사격장이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마을 주민이 아닌 외지인에게 사격장이 개방된 순간이었다. 사격장에 들어선 시위대는 매향리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원하는 종이 비행기를 날렸다.

50년의 고통, 13년의 투쟁

매향리에 사격장이 조성된 것은 1951년 한국전쟁 때였다. 미군은 법적 근거도 없이 농섬에 해상 표적을 만들어 사격 훈련을 했다. 1954년 미군이 사격장 지역에 주둔하기 시작했고, 한·미 행정협정 발효 이후인 1968년에는 해안 지역이 징발되었다. 현재 쿠니 사격장은 6백90만평에 달하는 해상 사격장과 해안 지역에 설치된 38만평 규모의 육지 사격장이 미군에 공여되어 있다. 불평등한 한·미 행정협정으로 매향리 마을 주민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땅을 미군에 내주었다. 미군은 마음껏 사격장을 유린했고, 그 결과 현재까지 사격장 인근에 남아 있는 섬은 농섬뿐이다. 농섬보다 컸던 구비섬은 폭격을 받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사격장에 시위대가 들어간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8년 12월12일 주민 7백여명이 오후 3시부터 3시간 동안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사격장 안에서 농성했다. 또 1989년 3월6일에도 마을 주민이 사격장을 점거한 적이 있다. 그저 나라를 구해준 미군이 하는 일이니 하고 참아 왔던 매향리 주민이 생존권 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1988년 7월4일 매향1리 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소음대책위원회(위원장 전만규)를 만들고, 청와대·국방부에 민원을 제기했다. 아무리 민원을 제기해도 정부가 반응이 없자 주민은 미군기지 점거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주민 구속이었다. 민주화 물결로 고조된 주민의 자발적인 투쟁은 물거품이 되었다. 주민들은 좌절감에 빠졌고 매향리는 다시 잠잠해진 듯했다.

그러나 매향리 투쟁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오늘에까지 되살린 사람이 있다. 매향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 전만규 매향리피해대책위원회 위원장(44)은 13년 동안 미친 듯이 사격장 문제에 매달렸다. 생업을 포기하고 논밭도 팔고, 집까지 팔아치우며 주민의 고통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그는 하루 종일 비행 횟수를 조사하고, 환경단체에 의뢰해 소음 피해를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그는 이런 자료들을 들고 국방부와 청와대뿐 아니라 멀리 일본 오키나와에까지, 매향리를 알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하지만 10여년 동안 누구 한 사람 알아주지 않았고, 변한 것도 없었다. 전만규씨는 1997년 8월에 할복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좌절하기도 했다.

남편이 돈도 되지 않는 일에 매달리는 동안 생활은 고스란히 부인 최선자씨(43)의 몫이었다. 최선자씨는 “처음에는 싸우기도 많이 했다. 지금은 남편을 믿고 따른다”라고 말했다. 현재 매향리피해대책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는 장소도 전씨가 월 20만원에 임차한 건물이다. 대신 부인 최씨를 비롯한 1남3녀 여섯 가족은 마을회관 한 구석을 빌려 생활하고 있다.
전만규씨의 희생적인 투쟁은 이번 5월8일 농섬 폭탄 투하 사건을 계기로 여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5월8일 주한미군 소속 A 10기가 농섬 근처에 폭탄 6발을 투하했다. 오전 8시 50분께 농섬 일대 주민은 지진이 난 것 같은 폭음과 진동을 경험했다. 매향리피해대책위원회와 시민단체들은 진상 규명과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파문이 확산되자 한·미 합동조사단은 5월18일부터 27일까지 현지 조사를 했다. 이 기간에 사격은 중단했다. 한·미 합동조사단은 6월1일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사태는 더 악화했다. 합동조사단이 ‘5월8일 폭탄 투하와 주민의 피해가 직접 관련된 것인지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곤란하다’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은 이같은 발표를 접하면서 허탈해 하고 분노했다.

추미애씨(25)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추씨는 이번 사건으로 유산할 뻔했다. 그녀는 지난 3월 석천 4리로 시집온 새댁이다. 5월8일 오전 9시께 이불을 개고 있던 그녀는 지진이 난 줄 알았다. 이전부터 비행기 소음에 신경이 쓰였지만, 엄청난 굉음에 집이 흔들려 순간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뱃속에 7주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날 밤에 일어났다. 유산에 가까운 하혈을 하기 시작해 그녀는 다음날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충격으로 인한 유산 가능성이 높다며 그녀에게 절대 안정을 권했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서도 귀마개와 이어폰을 끼고 생활한 덕에 유산은 면했다. 남편과 상의해 아기를 낳을 동안만이라도 친정에 가 있을 생각도 해보았지만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처지여서 포기했다. 폭격이 중단된 한달 동안 그녀는 정말 살맛이 났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6월2일 폭격이 재개되면서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출산후 아이가 걱정되었다. 한달 간의 평화로움이 갑자기 깨지면서 더 참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이사할 생각으로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국방부 정책 10년 전과 변함 없어

폭격 재개는 추씨뿐 아니라 매향리 주민 모두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집에 금이 가고, 유리창이 깨지는 피해가 있었는데도 폭격과 관계없다는 발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발표 다음날 전만규 위원장은 폭격이 재개되자 기총사격장 안에 있는, 사격을 알리는 황색 깃발을 찢어버렸다. 경찰은 전위원장을 군사보호법 위반으로 긴급 체포해 구속했다. 하지만 한번 불붙은 주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매향리 주민들은 6월28일 경기도 화성군청에 주민등록증을 반납했다. 그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기에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마을 주민들은 전만규 위원장이 구속된 이후에도 전열을 가다듬고 싸움을 계속했다. 문정현 신부를 포함한 시민사회단체의 연대 투쟁도 매향리 주민에게 힘을 보탰다.

합동조사단 발표 이후 매향리 사태가 꼬여 가자 국방부는 6월5일 서둘러 매향리 1·5리 주민의 이주 대책을 발표했다. 농섬 사격장 밖 2.4㎞ 위험지구 내에 있는 1·5리 주민부터 우선 이주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주민들 “반드시 사격장 폐쇄시킨다”

국방부는 최근 기총사격장을 이전할 유력한 후보지로 충남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일대 공군사격장을 꼽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황리 주민은 한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지 않은 A 10기가 목격되자 이미 미국 공군의 훈련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주한미군측은 이에 대해 “사격장 폐쇄나 이전은 결정된 바 없다. 그리고 우리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우리는 국방부가 또 다른 공여지를 제공하면 그곳을 사용하면 된다”라고 밝혔다.

국방부와 주한미군의 협상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매향리에는 폭격이 계속되고 있다. 7월10일 매향3리 이세원씨(42)는 사산된 송아지를 받았다. 올해 들어 벌써 여섯 번째 송아지 사산이다. 이씨는 “사격장 폐쇄를 고려해 훈련을 잠정 중단한다는 보도가 나와 안심했다. 보도와 달리 기총사격은 계속되고 있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라며 허탈해 했다.

그런 이씨에게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6월3일 구속되었던 전만규 위원장이 7월13일 보석으로 석방된 것이다. 석방 전날 기자와 면회한 전위원장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고생이다. 안에서도 보도를 접하고 있다. 끝까지 싸우라고 전해 달라”고 말했었다. 전위원장은 “국방부 기총사격장 폐쇄 보도 역시 믿을 수 없다. 주민들의 힘으로 반드시 사격장을 철폐시키겠다”라고 다짐했다.

전만규 위원장이 석방된 다음날 오전부터 A 10기 2대가 대책위 사무실 바로 위에서 굉음을 내며 기총사격을 실시했다. 철조망을 지키던 전경들은 폭음에 놀라 귀를 막고, 잠을 자던 전경들은 깨어났다. 매향리 주민이 지금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정책 담당자들이 이곳에 와서 하루만이라도 살아 보고 주민의 편에서 정책을 세워 달라는 것이다. 그때 그들은 반납했던 주민등록증을 되찾겠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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