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에 ‘정보’가 없으니…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4.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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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첩보 수집 능력 여전히 부실…비선 조직 구축·비밀 요원 육성 ‘급한 불’
“국정원이 명실상부한 국가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권력 기관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으로 바로 섰다.” 6월10일 국가정보원 창설 43주년에 맞추어 노대통령은 국정원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앞선 6월7일 17대 국회 개원 연설에서도 노대통령은 “국정원은 자신이 할 일만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과 절친한 한 대학 교수는 “국정원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노대통령은 최근 ‘국정원의 힘을 뺀 것은 나의 치적이 아니냐’라며 흡족해했다”라고 말한다.

6월28일 김선일씨 사건을 계기로 사의를 표명한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노대통령은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는 후문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이 국정원장에게 부조리한 시스템을 바로잡는 정책 정보와 고비처(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를 지원하는 사정 정보 수집에 힘써 달라고 주문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국회 정보위원장으로 내정된 문희상 의원(열린우리당)은 “참여정부는 국정원의 젖을 뗐다”라고 말했다. 그는 “국정원 직원은 권력이 아닌 국가를 위한 정보기관의 고유 임무를 실수 없이 해내고 있다. 김선일씨 피살과 관련된 국회의 국정 조사 대상에서 국정원은 제외하는 것이 옳다”라고 밝혔다.

김선일씨 납치 사건과 관련해 외교부·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비해 국정원은 여론의 비난 공세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다. 하지만 국정원이 국민으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는 것은 아니다. 국정원의 임무가 테러 예방 및 해외 정보 수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책임은 가볍지 않다. 정부는 김씨를 살해한 테러 단체조차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지독한 정보력 부재 상태에 빠져 있다.

한나라당은 ‘참여정부에 국정원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매섭게 몰아세웠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도 국정원의 정보 수집 활동이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일부 여당 의원들도 국정원을 질타하고 있다. 이종걸 열린우리당 수석부대표는 국정원에 대한 조사를 강조한 바 있다.

정보기관의 정보력은 국력으로 직결된다. 지금 국정원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공언한 대로 국정원은 해외 정보 수집 기능에만 주력하는가. 국정원은 김선일씨 사건에 어떻게 대응한 것일까. 국정원의 현주소를 살펴보았다.

참여정부의 국정원은 국가안전보장회의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노대통령은 국정원의 1일 정보 보고를 받지 않는다. 대신 통일·외교·안보 등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 보고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통해 받고 있다. 국정원 정보도 국가안전보장회의로 올라간다. 이를 국가안전보장회의 이종석 차장이 대통령에게 1일 보고를 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정보의 콘트롤 타워는 국정원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로 넘어간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각 부처 담당자는 물론 미국·일본 대사관 직원과 외신 기자조차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면서 국정원의 위상이 위축되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지 여부는 조직의 자부심과 위상에 직결되는 문제다. 국정원 직원들이 기운이 빠진 상태다”라고 말했다. 한 대사관 관계자도 “과거 정보기관의 힘은 청와대 1일 정보 보고와 1주일에 한 번 있는 대통령 독대에서 나왔다. 지금은 아무래도 국정 정보를 다시 거르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 국정원장의 대통령 독대 관례는 사라졌었다. 하지만 국정원의 위상이 약해진다는 이유로 고영구 원장 때부터 2주일에 한 번 정도 대통령을 독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최근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통일부·국방부 장관과 국정원장의 대통령 직접 보고가 50여 회 된다고 발표했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국정원 현안 정보가 매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되다 보니 고원장은 독대에서 경제와 해외 정보 위주의 보고를 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의 힘에 밀려 국정원이 태업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방치해 국정원의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직원들이 일도 안하고 시간 가기만 바라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반해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은 “국정원 직원들처럼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은 없다”라고 반박했다.

고영구 국정원장은 무난하게 조직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보직을 주지 않는 ‘심의관제’를 도입해, 구조 조정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했다는 지적이다. 국정원은 2006년까지 3급 이상 고위 직급을 23.7% 감축하고 실무 역량을 보강하는 구조혁신안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고원장은 정보기관 본연의 임무보다는 조직 개혁과 예산 줄이기에만 매달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최근 국정원은 국장 관용차와 운전기사를 없앴다. 간부 수당도 삭감했다.

참여정부가 강조하는 국정원의 임무는 국내 정치 정보 배제와 해외 정보 강화이다. 정치 정보를 배제하겠다는 노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국정원은 다양한 분야의 정보 수집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찰·검찰 등 다른 부처 정보원과 부딪칠 때가 적지 않다.

대검찰청의 한 정보 담당 직원은 “국정원 직원들이 과거 관심을 갖지 않던 곳까지 쑤시고 있다. 전자공학 박사가 전파사에서 선풍기 고치는 꼴이다”라고 비판했다. 경찰청의 한 정보 담당 직원은 “국정원 직원의 정보과 형사 접촉이 눈에 띄게 늘었다. 국정원 직원들이 어떤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에서 정치 정보는 여전히 핵심 분야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정치 정보 아니면 실적을 올릴 게 없다. 대통령만 안 보지 청와대에서는 보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국정원은 지난 정권에 비해 달라진 게 없다. 국정원은 당장 정치 정보에서 손을 떼야 한다”라고 말했다. 홍의원은 국정원에 국제 조직·테러·무기 밀매·마약 밀매 등에 관한 수사권을 주어 국정원이 국제 범죄에만 매달릴 수 있도록 하는 국가정보원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

후보 시절 노대통령은 국정원을 아예 ‘해외정보처’로 개편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국정원도 틈만 나면 해외 정보에만 매달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해외 정보 수집 능력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김선일씨가 피살된 이후 대통령이 외교부를 방문해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한 것은 국정원의 정보 부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물론 국정원도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라크에서 요원 3백~4백 명이 활동하는 미국의 정보기관도 미국인 폴 존슨 납치 살해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 직원 8명 중 1명만이 국정원 직원이다.

이라크 대사관에 파견된 국정원 파견관은 중동 분야를 20년 넘게 담당한 전문가였다. 국정원은 지난 5월10일 가나무역과 관련한 첩보를 입수해 김천호 사장에게 주의를 주었다. 가나무역이 납품 경쟁에서 탈락한 현지 업체의 반감을 사고 있으며, 기독교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이라크인들의 정서를 자극한다는 첩보였다. 김씨가 납치된 사실이 전해지자 국정원은 이틀 동안 70여 개국 정보기관에 협조를 구하고, 이라크 부족장·종교지도자 들과 다각적으로 접촉하며 김씨 탈출에 힘썼다.

그러나 김천호 가나무역 사장의 ‘오락가락 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은 국정원의 중동 정보 부재를 반증한다. 국정원이 미국 정보기관과의 정보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졌는가는 짚어볼 대목이다.
2003년 6월 노대통령은 국정원을 방문해 동북아 중심 국가의 중추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이후 국정원은 국내외 경제 부서를 하나로 묶는 국익전략실을 신설했다. 이를 국정원 직원들은 A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A실은 미국 정보기관의 견제에 부닥쳐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A실 설립 외에 해외 정보력 강화를 위한 국정원의 노력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국정원 안팎의 평가다.

해외 정보 인력을 기르기 위한 노력도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정보기관의 해외 인력은 크게 ‘화이트’와 ‘블랙’으로 나눈다. 화이트(백색 요원)는 각국 대사관에 보내는 국정원 파견관을 이른다. 공식적인 정보 수집 요원이다. 이들은 해당 국가에 3년간 파견되고 귀국해 1년 이상 근무하다가 다시 나가거나 부서를 옮기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화이트는 정보 수집에 한계가 있다. 첩보 활동이 해당국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기 때문이다.

노출되지 않은 블랙(흑색 요원) 육성이 필수이다. 더군다나 지난 정권에서 국정원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상당수 블랙이 추방되고 피격되는 등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정보 네트워크는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실정이다. 현지 유학생이나 교민을 블랙으로 채용해 해당 국가에 취업시키는 등 고용 방식의 다변화를 꾀해야 한다. 하지만 국정원은 공채에만 의존해 블랙 육성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정보요원들에게 007과 같은 눈부신 활약과 희생만을 강요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등 세계 정보기관과 교류 협력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국정원의 힘을 키우는 관건이다. 과거 북한의 움직임만을 감시하던 것에서 벗어나 세계화 시대에 대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는지도 국정원이 먼저 살펴야 할 대목이다.

김선일씨의 희생이 국정원의 총체적 비전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국정원의 힘은 국가의 힘으로 귀결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대로 국정원이 해야 할 일은 더 늘어나고, 그 책임은 더 막중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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