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 외면하고 인권 정부라니…"
  • 정희상 기자 (hschung@e-sisa.co.kr)
  • 승인 2001.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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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양민학살 51주기 맞아 합동 위령제… 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이젠 이뤄져야"

사진설명 눈 감을 수 있을까 : 1950년 8월 미군에게 4백여명이 학살당한 현장에서 열렸던 영령 위로 진혼제.

해마다 예수 탄생일 전야를 몸서리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1949년 성탄절 전야에 지리를 잘못 알고 들이닥친 국군 제2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 소속 무장 군인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가 남녀노소 86명이 학살당하는 현장에서 살아 남은 경북 문경시 산북면의 산골 마을 석봉리에 사는 부상자와 유족들이다(<시사저널> 제473호 참조). 이들이 통한의 눈물을 뿌린 지가 벌써 51년째다. 그러나 지난해 이들에게 성탄 전야는 자그마한 '축복'의 서광과 함께 찾아왔다. 지난해 12월24일 석봉리에는 마을이 생기고 처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과 비슷한 학살 사건을 겪고 상처 난 가슴을 쓰다듬으며 50년 세월 동안 한을 삭이고 살아온 각지의 민초들이 문경양민학살51주기합동위령제에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힘을 합치겠다며 나선 국회의원·교수·변호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피학살전국유족회 회장이기도 한 채의진 문경양민학살유족회장(65)은 이렇게 말했다. "명백한 증거가 드러난 민간인 학살 사건조차 해결을 외면하는 현정부는 더 이상 인권을 중시하는 정부라고 자처해서는 안된다."

문경양민학살 사건은 1998년과 1999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 보관된 사건 관련 기밀 문서를 <시사저널>이 단독 입수해 보도함으로써 진상이 공개된 사건이다. 정부는 학살 직후 사건을 공비의 소행으로 몰아붙인 뒤 50년 동안 은폐와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다 지난해에야 국방부가 나서서 비공개리에 현장을 조사하고 국군이 저지른 학살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정부는 사건의 진실을 알면서도 아직껏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족들은 문제를 해결
하려면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들은 지난해 8월 전남 함평과 경기도 고양의 금정굴, 여순 사건 양민학살 유족과 연대해 국회와 정부의 직무유기에 대한 헌법소원을 냈다. 아울러 문경 양민학살 유족은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47년 만인 지난해 똑같은 아픔을 안고 사는 다른 지역 유족과 손잡고 전국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유족들의 이런 움직임은 뉴밀레니엄을 맞아 우리 사회에서도 선진적 인권의 지평을 확장하자는 학계와 인권기구들의 노력과 맞물려 힘을 얻었다. 지난해 2월 한국인권재단이 제주도에서 연 '인권학술회의2000'에서 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가 제기된 이후 학계와 법조계 중심으로 본격적인 연구 조사 및 지원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어 강정구(동국대)·김동춘(성공회대)·강창일(배재대)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지난해 4월 초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은 민간인학
살 인터넷 홈페이지(www.genocide.or.kr)를 개설해 전국 각지의 피해 유족과 연대 활동을 펴고 있다. 6·25전쟁 50주년을 맞아 사상 최초로 전쟁과 인권 심포지엄을 연 이들은 9월7일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를 결성했다. 이와 더불어 조용환·백승헌·강금실 변호사가 주축이 된 민간인학살 관련 헌법소원 변호인단이 문경·여순·함평·고양 등지에서 군경이 저지르고 은폐된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유족 '증언' 봇물

이같은 흐름을 타고 지난 가을부터는 아직까지도 전국 각지에서 흩어져 숨죽이며 살아온 민간인 대량 학살 피해 유족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역 시민단체와 연대해 학살 현장을 발굴하고, 속속 유족회를 꾸리고 있다. <시사저널>이 지난 10년 동안 발굴해 잇달아 보도한 양민 학살 사건, 즉 문경·함평·산청·고양·거창 사건과 보도연맹 학살 등 굵직한 사건 외에도 부산·경산·포항·마산·통영·김해·밀양·거제·화순·나주 등지에서 새로운 민간인 집단 학살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국 각지의 피학살자 유족과 범국민위원회가 이런 활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어 내려는 목표는 진상 규명과 특별법 제정이다.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김동춘 교수는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이후 50년 동안 발생한 인권 유린의 축소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도사린 모든 인권 문제는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국가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인권 유린이 내재화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국회 차원에서 진상규명특위를 발족하고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는 것이다.

유족과 학계·인권단체 등이 민간인 학살을 전면적으로 들고 나오자 일부 국회의원도 호응하고 나섰다.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모임'(회장 김원웅 의원)은 최근 범국민위원회와 함께 국회에서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아울러 16대 국회 회기 중에 특위를 구성해 특별법 제정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새해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중요한 인권 숙제 가운데 하나로 떠오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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