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키 고 홈' 구호 없는 오키나와 반미 운동
  • 정유진(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평화교육위원장) ()
  • 승인 2001.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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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 반대 운동 6개월 참관기/전쟁 체험을 생명 존중으로 승화

사진설명 "변칙 플레이 미국 퇴장하라" : 오키나와 주민들은 빨간 옷을 입거나 빨간 리본을 옷에 다는 "레드카드 운동"을 통해 미군 범죄에 항의하는 뜻을 표시한다.

일본 열도의 남쪽 끝, 한국·타이완·필리핀 사이에 자리잡은 태평양의 요지 오키나와는 1995년 미국 해병의 소녀 성폭행 사건에 대해 8만5천여 주민이 모여 항의해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낸 곳이다. 미군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을 하던 나는 1997년 5월 오키나와를 방문했고, 그 때 처음 '이노치 고소 다카라(命こそ寶·생명이야말로 보물)'라는 그 곳의 옛말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구나.' 국가와 민족, 조직과 집단을 유난히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서 성장한 나에게 그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생명이야말로 보물이라는 철학을 가진 오키나와 사람들의 평화에 대한 생각을 배우기 위해 지난해 6개월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평화운동가 28명을 인터뷰했다.

오키나와 평화운동가들은 평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오키나와 전투와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경험을 들었다. 이들은 오키나와 전투를 겪으면서 군대는 결코 인간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확실히 죽여야만 했던, 가족·이웃끼리 서로를 죽였던 '집단 자결'을 통해 전쟁의 참혹성을 배웠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은 미국과 영국을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동물'이라는 의미로 귀축미영(鬼畜米英)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주민에게, 미군 포로가 되면 여자들은 능욕 당하고 남자들은 사지가 찢겨 죽는다며 반미 감정을 철저히 주입했다.

이러한 반미 감정의 영향으로 1945년 4월 미군에게 포위된 오키나와 요미탄(讀谷)의 치비치리 동굴에 숨어 있던 주민 사이에 칼과 낫과 끈으로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집단 자결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인터뷰한 여성 운동가 미나모토 히로미(源 啓美) 씨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전쟁 체험을 말해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몇 번 자살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해 '어쩔 수 없이' 살게 되었는데, 죽는 것보다 살아가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고 한다.


"반기지 운동은 베트남전 피해자에게 용서 비는 일"

가족을 죽이고 마지막에 자신만 살아 남게 된 이들 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가족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족을 '지켰다'고 믿고 있다.

베트남전쟁 때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군 전투기가 민중을 학살했다는 사실도 그들이 평화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그런 현실을 묵인한다면 결국 우리도 가해자가 된다는 고통에 시달렸다. 지금의 반(反) 기지 운동은 베트남전 피해자에게 용서를 비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말은 역으로 나에게 '한국인에게 베트남전쟁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전을 이용해 '반공이 아니라 멸공'이라며 공산권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했다. 전쟁이 오키나와 주민에게는 평화를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되었지만, 분단과 군사 정권의 지배 등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는 증오감만을 키웠을 뿐이다. 전쟁 경험을 평화 의식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부분이다.


"양키 고 홈 구호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

사진설명 "군사 기자 반대" : G8 정상회담이 열리던 지난해 7월20일 주민 2만7천명이나 가데나 기지를 에워쌌다.

오키나와 반기지 운동을 보고 또 하나 내가 놀란 것은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가 없다는 것이다. 오키나와에 가기 전까지 나는 그 곳에서도 그 구호가 사용되는 줄 알았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고 장기간 미군 주둔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등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는 오키나와에 '양키 고 홈' 구호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에 대해 그곳 평화운동가들은 "그런 슬로건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반기지 운동은 단지 기지를 없애는 운동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바꾸는 운동이기 때문에 '양키 고 홈' 구호는 부적절하다. 미군기지 문제는 미국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군사 시스템의 문제이다. 군대가 구조적 폭력이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군대 자체를 없애는 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또 인간 존중의 처지에서도 그런 구호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양키란, 일본인을 가리켜 잽(Jap)이라고 부르는 말처럼 상대방을 비하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양키라는 말로 집단화하면 그 속에 있는 개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므로 구체적 인간 관계를 맺기가 어려워진다. 어떤 민족이냐 이전에 한 사람, 하나의 생명으로 생각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9월 매향리 미군 사격장 폐쇄를 위한 문화 한마당에 참여했을 때, 대학생들이 매향리 곳곳을 행진하면서 "양키 고 홈, 주한미군 철수" 투쟁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때 시위 행렬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지역 주민의 냉담한 시선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매향리까지 와서 굳이 주민도 공감하지 못하는 구호를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50년 넘게 폭격 소음에 시달려온 주민의 고통을 중심으로 생각했다면 아마도 다른 구호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미군 철수만이 절대 진리로 각인된 현재의 반미 운동 진영에서는 주민과 공감할 구호를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다. 인권과 생명보다는 분노와 적개심이 중요시되는 운동 문화에서 '양키 고 홈'이라는 깃발을 내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오키나와에서는 1960년대에 이미 사라져 버린 '양키 고 홈' 구호가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분신하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제기되었다. 물론 나도 14년 전 학생운동을 할 때는 '양키 고 홈'을 외쳤다. 하지만 1993년 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이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게 되었다.

미군 범죄 피해자의 고통은 단지 미군이 주둔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빈곤과 성차별로 인해 이미 고통받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만나면서 미군 문제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모순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주한미군이 만악(萬惡)의 근원이며 미군만 철수하면 한국 사회의 모든 모순이 해결된다는 식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게 되었고, 그런 맥락에서 사용되는 '양키 고 홈' 구호를 말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문제는 이른바 '운동'하는 사람들 마음대로 '어떤 문제가 1번이고 어떤 문제는 2번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다양한 모순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모두 자기가 당하는 문제가 가장 큰 폭력이기 때문이다. 인권은 '소수의 문제냐 다수의 문제냐'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주한미군 문제를 '적을 몰아내자'고 외치면서 분노와 적개심에 호소한다면 그에 대한 메아리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분노는 누군가를 증오하는 감정으로 흐르기 쉽고, 적개심은 인권과 생명을 경시하고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간과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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