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죽이고 싶다?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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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대학생들 '아버지 거부감' 극심…존재 의미조차 부정


신세대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까. 서강대에서 '남성 문화 연구'를 강의하는 정유성 교수(교육학)는 수업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단상을 써오게 한다. 놀랍게도, 학생들이 제출한 단상 중에 아버지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글은 거의 없다.




특히 남학생들의 거부감이 심하다. 아버지를 좋게 평가한 남학생은 30명 중 3∼4명 정도이다. '아버지가 너무 싫다' '무섭다' 심지어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때가 있다'고 고백한 학생도 있다. 한 남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자유에 눈을 뜨는 시기인 만큼 신입생∼군 입대 전에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이 정점에 달하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아버지는 '한 여성으로 하여금 그 인생을 포기하게 만든' 무책임한 가장이자, '남자 새끼가 그것도 못하냐'는 말로 자신을 억압한 폭군이며, '부자 간의 끈끈한 정을 단 한 번도 느껴볼 수 없게 만든' 위압적인 존재이다.


이 중 일부는 아버지가 단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뿐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들에게 직접 말 한마디 걸지 않다가 내가 외출한 다음에야 어머니를 통해 행방을 묻는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뒤늦게 들으며 가슴 아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들은 냉정하다. '정을 쌓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결론을 내려 버리는 것이다.


동일시할 아버지가 없는 현실에서 아들은 '아버지 결핍증'에 시달린다. 서강대 국문과 4학년 고영일씨(26)는 "남자들은 이미 사춘기 때부터 우상을 찾아 헤맨다"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영화 〈친구〉의 유오성이나 궁예·박찬호처럼 카리스마 강한 인물이 남성에게 인기를 끄는 것은, 이들이 곧 아버지의 대용품이기 때문이다.


정유성 교수는 압축적 근대화 이후 만성화한 '아버지 부재(不在)'로 인해 이제는 아버지 결핍증을 지나 아버지의 의미조차 부정하며 자라는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아버지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헐벗은 자기 존재를 알지 못하고 권위와 부성의 신화에 더더욱 매달리는 동안 아들은 상징적인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살부(殺父) 충동까지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 이같은 위기가 해소되지는 않는다. '친여성주의자 모임 귀띔'의 한 남성은 '내 몸 속을 흐르는 절반의 나쁜 피'를 직시함으로써 "내가 얼마나 모자라고, 자기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지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자기 안의 '아버지', 거기에 길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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