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탱크에 맨몸으로 맞선 파주 장파리 주민들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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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다그마 훈련장 분규 현장 취재/
주민 "거저 뺏은 땅 돌려달라"


'우∼∼웅' 굉음이 울리며 육중한 탱크가 질주했다. 50∼60t이나 되는 탱크가 지나간 길에는 바퀴(캐터필러)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비포장 길은 한순간에 흙이 패여 자동차가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탱크는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헤집고 다녔다. 캐터필러 자국은 길에만 나있지 않았다. 옥수수밭 가장자리에는 여지없이 캐터필러 자국이 선명했다. 다 자란 옥수수를 짓밟고 지나간 것이다. 곳곳에서 연막탄이 터지고, 기관총 소리가 요란했다. 미군들이 매복해 수색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런데 이런 살벌한 전쟁터 한편에서 한 농민이 트랙터로 밭을 갈고 있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탱크와 트랙터가 공존하는 이곳이 바로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에 위치한 미군 2사단 기갑부대의 다그마 훈련장이다.


최근 다그마 훈련장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훈련장을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을 인접 주민이 가로막고 나섰다. 지난 8월13일부터 장파리 주민은 주한미군 탱크를 상대로 육탄 저지 투쟁을 벌였다. 왜 이들은 미군 탱크를 가로막은 것일까?


주민 7명 잇달아 음독 자살


'미군 탱크 출입금지' '강제로 징발한 땅 조속히 반환하라'. 훈련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걸린 플래카드 2개에는 장파리 주민의 분노와 염원이 배어 있는 듯하다.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통일로를 한 시간 반 정도 달려 324번 지방도로로 빠지면, 도로변을 따라 2km에 걸쳐 장파리가 펼쳐진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지만, 2차선 도로 양쪽으로 이어진 단층 건물에는 쇠락한 기지촌 자취가 남아 있다(상자 기사 참조).




훈련장에 포함된 73만평의 사유지 곳곳에 심어놓은 농작물이 못쓰게 되었다(오른쪽). 장파리 주민은 참다 못해 탱크를 몸으로 막았다(맨 오른쪽).


1971년 미군이 동두천으로 옮겨가면서 장파리는 그야말로 파리만 날리게 되었다. 그래도 농사를 짓고 살면 되겠지 싶었는데, 주민은 날벼락을 맞았다.


미군이 떠난 지 2년 만인 1973년부터 느닷없이 사유지를 징발당했다. 그렇게 해서 들어선 것이 스토리 사격장과 다그마 훈련장이다. 미군 2사단 기갑부대가 사용하는 다그마 훈련장은 장파리 인근의 장좌리 주민을 소개(疏開)한 뒤 징발했다. 당시 보상금은 시가의 10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이었다. 주민이 반발했지만, '국가 안보'를 내세우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징발 대가로 받은 헐값 채권도 먹고사느라고 절반 값에 팔아 버려, 장좌리 주민들은 하룻밤에 생계가 막연해졌다. 고향 땅을 잃은 주민 가운데 안 아무개씨, 조 아무개씨 등 7명은 잇달아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다. 김남근씨(48)는 "아마 그때 화병 안 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그마 훈련장내 사유지가 미군에 공여되었다는 점이다. 40만평을 징발해 들어선 훈련장은 시간이 갈수록 확장되어 지금은 1백70만평에 이른다. 국방부는 토지를 징발한 뒤 주민 출입을 통제했다. 주민들은 전방 지역에서 흔한 출입 통제로만 알았다. 아무런 의심 없이 계속 농사를 짓던 주민은 1995년 스토리 사격장내 사유지가 공여된 사실을 알고, 혹시나 하고 다그마 훈련장도 조사했다. 그 결과 사유지 73만평이 미군에 공여된 것을 알았다.


주민들은 어떻게든 땅을 되찾으려고 1997년 12월 소송을 벌였다. 그들이 땅찾기 운동에 나서자, 우연인지 1998년부터 기갑부대가 본격적인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탱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다그마 훈련장은 방치되다시피 했다. 다그마 훈련장을 지나기 위해서는 장파리 마을을 관통하는 324번 지방도로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비좁은 2차선 도로여서 탱크가 지나가면 자동차뿐 아니라, 인도가 따로 없어 사람마저 위험하다. 그러나 당시 미군 탱크들은 마을을 '질주해' 통과했다. 1988년 4월14일 정완수씨(44)는 후진하는 미군 차량에 큰아들(당시 7세)을 잃고 말았다. 정씨는 사고를 낸 미군 운전병으로부터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 아직껏 그것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탱크가 지나다니자 주민의 재산 피해도 만만치 않다. 미군 탱크가 지나가는 도로에서 5m도 안되는 곳에 파평낙농단지 2백45평이 조성되어 있다. 1995년 이인제 경기도지사가 직접 준공식에 참석했을 만큼 정부가 특별히 지원한 곳이다. 미군 기갑부대가 훈련을 하지 않았기에 정부도 이곳에 낙농단지를 조성한 것이다. 정부만 믿고 사재를 털었던 다섯 가구는 지금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조성된 지 5년도 안 되어 미군 탱크가 지나가면서 소들의 유산이 잇따르고, 산유량 감소가 두드러졌다. 젖소 54마리를 키우는 윤영일씨(62)에 따르면, 탱크가 한번 지나가면 소가 스트레스를 받아 보통 산유량이 30kg 감소한다. 놀란 소들이 뛰어다니며 송아지를 짓밟기도 해서, 윤씨는 올해 송아지 2 마리를 잃었다. 지금까지 유산한 송아지만 10마리가 넘는다. 그뿐이 아니다. 지난 6월 탱크 소리에 놀란 소에게 윤씨는 가슴을 채였다. 이광선씨(64)도 지난 8월19일 소뿔에 받쳐 갈비뼈가 부러졌다. 윤영일씨는 "이대로 가면 3억원이 넘는 부채를 갚을 길이 없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군 얘기는 숨소리만 빼고 다 거짓말"




탱크가 지나가면서 도로변 주택은 균열이 생겨 비만 오면 빗물이 새기 일쑤다. 훈련장이 인접하다 보니 심지어 유탄이 날아들기도 한다. 1999년 김정식씨(59)는 우사에 갔다가 바로 옆에 유탄이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지난 30년 동안 희생을 강요당한 장파리 주민들은 이제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런 주민의 분노에 주한미군은 오히려 기름을 부었다. "자꾸 막으면 그냥 지나가겠다. 민간인은 탱크로 깔아뭉개도 (주한미군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지난 8월15일 새벽 한 주한미군 장교가 탱크를 막아선 주민에게 이렇게 내뱉었다. 8월16일 밤 11시 주민 100여 명은 발언 당사자의 사과를 요구하며, 작심한 듯 또다시 탱크를 막았다. 주민들은 탱크 앞에 드러누울 태세였다. 다급해진 미군은 주민의 피해를 조사하고, 우회 도로를 찾겠다고 제안했다. 주민들은 속는 셈치고 길을 터주었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미군 얘기는 숨소리만 빼고 모두 거짓말이다"라는 김남근씨의 말마따나 주한미군은 바로 다음날에도 사과 한마디 없이 탱크를 몰고 마을을 통과했다. 정인호 장파리 이장은 "서울 압구정동 주민만 국민이고,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다. 다그마 사격장은 폐쇄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8월18일부터 주한미군은 장파리 주민을 의식해 답곡리쪽 길을 이용하고 있다. 장파리는 어느새 제2의 매향리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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