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 살인 행동대 '백의사'
  • 박성준 기자 (snype00@e-sisa.co.kr)
  • 승인 2001.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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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 요인 암살에 모두 개입…
좌·우익 가리지 않고 '고객 주문' 따라 저격
1945년 8월부터 6·25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한반도에서는 좌나 우를 불문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총성이 그칠 날 없었다. 요인 암살은 좌우 갈등과 정파 대립을 격화시키며 한반도 전체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최근 이같은 암살 사건과 관련해 백의사라는, 일반인에게는 다소 낯선 단체가 주목되고 있다. 백의사가 미군 방첩대(CIC)와 관계를 맺고 활동해 왔으며, 이들이 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일어난 요인 암살 사건의 대부분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최근 발굴된 '실리 보고서'를 통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신익희가 조직한 특수 행동대로 출발




암살 두목과 그 '희생자들' : 염동진이 이끌던 백의사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 정국의 요인들(오른쪽 3인)을 '처단' 했다.(왼쪽부터 염동진(본명 염응택),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백의사는 임시 정부 내무부장을 지낸 신익희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 총통이 만든 '남의사'를 본떠 1945년 조직한 특수 행동대이다. 이 조직의 총책은, 광복 전 한때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첩자 노릇을 했으며, 광복 뒤에는 미군 방첩대와 접촉하며 청부 살인을 한 염동진(본명 염응택)이다. 염동진은 1932년 중국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 운동을 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붙잡힌 뒤 '전향'해 일본군 밀정이 되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요인 암살 사건에는 모두 백의사가 개입되어 있다. 광복 이후 첫 암살 사건으로 기록된 1945년 9월 좌익 인사 현준혁 암살, 1946년 9월 김일성·김 책·강양욱 암살 기도 사건, 1947년 7월 중도 좌익인 몽양 여운형 암살 사건 등을 모두 백의사가 저질렀다. 이들은 또 송진우·장덕수 등 우익 인사 암살에도 직·간접으로 관여했다.


실리 보고서에서 안두희가 백의사 행동 대원이라는 점이 밝혀짐에 따라 백의사가 백범 암살에도 관여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낳고 있다. 초창기 백의사는 백범(또는 신익희)의 영향 아래 있었다. 김일성·김 책·강양욱 등 북한 요인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1946년의 이른바 '3·1절 사건'을 백범이 주도했다는 것이 현재 학계에서는 정설이다. 당시 북한은 암살 기도 사건의 '배후'로 김 구와 이승만을 지목하고 '테러 강도단 두목'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서중석 교수(성균관대)의 설명에 따르면, 백의사는 1946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백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백범과 신익희의 사이가 벌어지자, 신익희의 조직이었던 백의사도 덩달아 백범을 경원시하게 된 것이다. 1947년 백의사는 한민당 계열의 정치 지도자였던 설산 장덕수를 암살해 한때 백의사와 인연을 맺었던 백범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백의사는 1948년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고, 각종 물리력이 경찰·군대 등 공식 국가 기구에 흡수·통합되면서 파괴력을 상실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더라도 백의사가 백범 암살 사건의 실행 주체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백범 암살 사건에 백의사가 직접 관여했다면, 백의사는 그야말로 '옛 주인을 문 개'와 다를 바 없다.


실리 보고서에 의해 이번에 새로 밝혀진 사실 중 놀라운 것은, 백의사가 미군 방첩대와 손잡고 각종 첩보 수집·정치 공작 활동을 벌였다는 점이다. 실리는 미군 방첩대가 1947∼1948년에도 백의사를 각종 작전에 활용했다고 진술했다.


실리 보고서에 따르면, 백의사는 '민주 한국과 한국 민족주의 부활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암살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백의사는 비록 '우익 행동대'를 표방했지만, 상황에 따라 '고객'을 바꾸어가며, 또는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고 암살을 일삼았던 직업적 청부 살인 집단에 가까웠던 듯하다. 말하자면 정국이 혼란할수록 '물 만난 고기', 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 되어 정국을 휘저은 해방 공간 최악의 사생아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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