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29 사태' 당한 태권도 대통령 김운용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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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사범 · 학생들,
'30년 집권' 김운용 총재 사퇴 요구…"인사 비리 끝장내자"
지난 10월29일 오전 11시 서울 올림픽 파크텔 3층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대한태권도협회(대태협·KTA) 전체 이사회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김운용 총재(70)가 입장하자 고함과 욕설이 오갔다. 급기야 태권도 사범들 간에 몸싸움이 벌여졌고, 회의를 중단하고 빠져나가는 김총재의 차량을 일부 사범들이 육탄으로 저지했다. 김총재로서는 평생 처음 봉변이었다.




그는 '태권도 하면 김운용'이라고 통할 만큼 태권도를 기반으로 세계 스포츠계를 주름 잡아온 거물이다. 지난 7월에는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선거에도 나섰다. 그런 그가 왜 이같은 변을 겪은 것일까?


대태협 회장을 비롯해 대한체육회(KSC)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 국제경기단체연합회(GAISF) 회장이며 국제올림픽(IOC) 위원인 그는 현재 민주당 고문으로 전국구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가히 태권도를 통해 '김운용 신화'를 이룬 셈이다. 하지만 그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더욱이 붕괴의 진원지는 그가 발판으로 삼았던 태권도계여서 충격파가 만만치 않을 듯하다.


김운용 총재는 1971년 7대 대태협 회장에 취임하면서 태권도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뒤 30년 동안 태권도계 빅3 단체(대한태권도협회·국기원·세계태권도연맹)의 수장을 동시에 맡으면서 태권도계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이같은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김위원장 특유의 용인술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태권도계는 '청도관' '무덕관' '연무관' '송무관' 등 관(館) 체제를 중심으로 8개 분파 30여 파벌이 난립했다(지금도 그 계보는 남아 있다). 1978년 10월5일 김총재는 관 체제를 전격 해체·통합하면서 박정희식 용인술을 연상케 하는 조직 장악을 시작했다. 박대통령이 2인자를 서로 경쟁시켜 자신의 확고한 기반을 다졌듯이 김총재 역시 이같은 용인술로 입지를 강화했다. 용인대 양진방 교수에 따르면, 인사권자인 김운용 총재는 태권도계 원로 이종우(74·연무관 출신)·엄운규(72·청도관 출신) 씨를 똑같은 직책에 임명하면서 항상 서로 견제하게 했다. 2인자들이 서로 계보를 유지하며 경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1인 체제가 확고해진다.


2년 전부터 '쇄신 파동' 잇달아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김운용 총재의 1인 체제도 시간이 흐르면서 도전을 맞았다. 1999년 처음으로 세대 교체 깃발이 올랐다. 당시 대태협 상임부회장을 맡은 이승완씨(61)가 태권도 제2의 중흥을 주장하며 1세대 이종우·엄운규 원로에게 2선으로 후퇴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씨는 '새천년 태권도회'라는 사조직을 통해 인적 쇄신을 주장하며 김운용 총재를 압박했다. 1차 쇄신 파동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쳤다. 세대 교체를 주장한 이씨의 순수성이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호국청년연합회 총재로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인 '용팔이 사건'의 배후라는 전력을 가지고 있다.


한번 올려진 쇄신 깃발은 계속 펄럭였다. 서울 지역 관장들을 중심으로 지난해부터 체제 비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판 대상은 처음에는 서울시태권도협회(서태협)였다. 대태협 산하 단체 가운데 서태협은 회원 수나 재정 면에서 가장 규모가 커서 서태협 회장 직은 태권도계의 요직으로 통한다. 서태협은 지난해 회장 선거에서 업무상 횡령과 배임 수재로 벌금 천만원과 추징금 7백80만원을 선고받은 송봉섭 회장이 재추대되면서 내분이 시작되었다. 전 강서구협회장인 한명학 관장, 태권도민주화추진위원회 김성천 관장, 태권도연구소 신성환 관장 등 이른바 재야 사범들이 서태협의 실세인 송봉섭 회장과 임윤택 전무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정치권으로 따지면 공천권과 마찬가지인 심사권을 가지고 있는 협회였으므로 이런 저항을 쉽게 가라앉힐 복안을 갖고 있었다. 서태협 임원으로도 활동했던 한 관장은 "승단 심사에서 소속 선수들을 떨어뜨리면 관장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지난 2월에는 서태협 임윤택 전무가 대태협 전무로 영전하며 승승장구했다. 인적 쇄신을 주장했던 재야 사범들로서는 화살을 인사권을 쥐고 있는 김운용 총재에게 돌렸지만, 끝내 소수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2차 인적 쇄신 파동 역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태권도학과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김운용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권도계의 학생 의거로 불리는 '4·16 사태'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판정 시비로 불거졌다. 4·16 사태를 계기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태권도 국가대표 선발전은 본선보다 치열한 예선전이다. 대표로 선발되면 본선 메달을 따는 것이나 다름없어 항상 잡음이 불거지는데, 올해에는 결선 대회가 열리기 전부터 선발 선수가 내정되어 있다는 '판정 오더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4월16일 대회 첫날부터 우려했던 불공정 판정이 일어나자 용인대 학생 2백50여명이 경기장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파행은 대회 기간 내내 지속되어 경희대의 한 선수는 불공정 판정에 항의하며 경기를 포기했고, 한 실업팀 감독은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실신하기도 했다.




용인대와 경희대 학생들은 대회가 끝난 뒤에도 국기원을 점거 농성하며 책임자 징계를 요구했고, 교수들까지 동참했다. 교수와 학생 들은 대회 운영의 실질적 책임자인 임윤택 전무의 친인척 2명이 심판진에 포함되었다며 그들을 징계하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학생들은 이번 기회에 태권도계에 쌓인 비리와 부정을 뿌리 뽑겠다며 김운용 총재를 비롯해 엄운규·송봉섭·임윤택 '동반 사퇴'를 주장했다. 정치인으로 따지면, 정계 은퇴 요구나 다름없는 초강수 카드를 들이민 것이다. 여기에 재야 사범들까지 연대하면서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대태협도 5월9일 수습에 나서 임전무를 사퇴시켰다.


그러나 김운용 총재는 지난 8월 낙마한 임윤택씨를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차장으로 임명했다. 인사가 만사임을 감안하면, 김총재가 스스로 반발을 자초한 셈이다. 문제 인사를 또다시 '영전'시키자 태권도계에는 김총재의 아들 김정훈씨가 인사에 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다(위 상자 기사 참조). 임씨뿐만 아니라 송봉섭 회장 역시 대태협 행정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김총재는 측근 인사를 끝까지 책임지는 인사 스타일을 반복했다. 학생들을 비롯한 개혁 세력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김운용 총재에게 돌렸다. 김총재는 기자회견을 통해 인사권은 총재 고유 권한이라며 쇄신 요구를 묵살하면서 "태권학과를 만들어 밥먹게 해준 사람이 누군데"라며 불쾌감까지 드러냈다. 이같은 발언을 전해 들은 개혁 세력의 집결체인 '범 태권도 바로 세우기 연합'이 10월29일 김총재가 태권도를 사유화한다며 실력 행사에 나선 것이다.


10월31일 제주도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연맹 총회에서 총재로 재추대되면서 김운용 총재는 대태협 회장 직을 사퇴할 뜻을 내비쳤다. 개혁 세력은 김총재가 차기 대태협 회장을 '말 잘 듣는' 관리형 회장으로 앉힌 채 친정 체제를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나머지 문제 인사도 동반 사퇴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IOC 위원장에 낙선한 데 이어 국내에서도 무너지기 시작한 김운용 신화의 끝이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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