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취 진동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 권은중·차형석 (jungk@sisapress.com)
  • 승인 2002.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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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단체장 구속 줄이어…단체장 사법처리 건수, 민선 1기의 2배…“현행 선거 제도가 부 패 부추겨”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지방자치제가 썩어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를 이끌어가는 단체장들이 각종 비리로 줄줄이 사법 처리 되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 지방 선거로 선출된 민선 2기 16개 광역단체 및 2백51개 기초단체의 단체장 가운데 4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8명에 대한 사법 처리가 진행되고 있다. 이는 민선 1기(23명)에 비해 2배에 이르는 숫자다.




특히 도지사·광역시장 같은 광역단체장 구속도 잇따를 전망이다. 웬만한 중진 국회의원보다 정치적 비중이 큰 광역단체장이 구속되는 일은 과거에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광역단체장이 여당 소속이면 검찰이 이들을 수사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또 검찰이 기를 쓰고 기소해도 재판부가 구속 영장을 기각하거나 석연치 않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임창렬 경기도지사 수뢰 사건이다.


임지사는 1998년 5월 지방 선거 때 서이석 전 경기은행장으로부터 경기은행 퇴출을 막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인천지검 검사들은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던 임지사를 소환해 구속·기소하기까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정치권과 검찰 수뇌부의 뜻을 거스르며 임지사와 부인 주혜란씨를 기소한 검사 가운데 몇몇은 인사 불이익을 받아 결국 검찰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데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억원을 선고받은 임지사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무죄 판결이 나자 이례적으로 법원 판결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3월 대법원(주심 박재윤 대법관)은 임창렬 도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고법의 원심을 파기했다. 대법관들은 퇴출 대상이었던 경기은행으로부터 임창렬씨가 돈을 받은 것은 대가성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경기도지사 재출마를 준비하고 있던 임창렬 지사나 민주당에게는 뼈 아픈 판결이었다.


정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단체장의 수난은 더 두드러졌다. 지난 3월 유종근 전북도지사가 세풍그룹으로부터 4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검찰에 따르면, 유지사는 1997년 12월 고대용 전 세풍월드 부사장으로부터 국제 자동차 경주대회 유치를 위한 인허가와 관련해 편의를 보아준 대가로 이 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민주당 경선 주자였던 유지사가 갑자기 구속되자 정치권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검사들 “지방 선거 앞두고 비리 제보 크게 늘어”




구속을 눈앞에 두고 있는 광역 단체장들도 있다. 문희갑 대구시장은 비자금 14억원을 관리해 왔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그동안 풍문으로만 나돌던 문시장의 비자금은 한나라당 대구시장 후보 공천 신청을 앞둔 10여 일 전 문시장 측근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문시장은 한나라당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해 검찰의 수사를 피하려 했으나 구속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최기선 인천시장도 대우자동차판매㈜로부터 3억원을 받은 혐의로 4월16일 대검 소환을 앞두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최시장은 1998~1999년 대우자동차판매 건설 부문 전병희 사장으로부터 인천 송도 신도시 개발을 둘러싼 각종 인허가 편의를 봐주고 3억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과거와 달리 광역단체장들이 줄줄이 사법 처리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검찰이 변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이명재 총장 취임 이후 검찰은 신뢰 회복을 벼르며 정치인 사정을 대대적으로 진행해 왔다. 이런 검찰의 수사망에 일부 광역단체장이 속속 걸려든 것이다.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는 “후원금 처리가 가능하고 면책특권이 있는 의원들과 달리 정치자금 모금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단체장은 일단 비리 사실이 확인되면 바로 구속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선거 사범을 다루는 한 공안 검사는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광역단체장도 사법 처리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검사들은 선거철을 앞두고 더욱 많은 단체장이 사법 처리 될 것으로 본다. 현직 단체장의 비리에 대한 제보가 끊이지 않는 데다 단체장들이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한탕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불출마 선언을 한 단체장들도 퇴임 전 마지막으로 ‘챙기기’에 나설 수 있기 때문에 사정기관은 밀착 감시를 하고 있다. 현재 구속되거나 구속될 위기에 처한 광역단체장 4명 가운데 임창렬씨를 제외한 3명이 모두 재선이며 또 불출마 선언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광역단체장은 언론에 노출되어 있고 사정기관의 감시를 받아 그나마 깨끗한 편이다. 시민들 생활과 직접 연관이 있는 기초단체를 책임지는 시장·군수·구청장 들의 비리는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서울시의 한 전직 구청장은 “구청장·시장 같은 기초단체장은 건축·위생·환경·도시계획 등 시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분야에서 인허가와 관련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다. 하지만 감시할 방법이 없어 비리가 창궐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철저한 감시와 시민 참여가 ‘방부제’


행자부가 3월29일까지 집계한, 기소된 단체장 40명의 혐의를 보면 뇌물(17명), 정치자금법 위반(2명), 배임(1명) 등 돈과 관련해 사법 처리된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46쪽 표 참조).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9명은 모두 선거법을 위반했다. 이처럼 단체장이 줄줄이 구속되어 사법 처리를 당하자 행자부는 1999년부터 단체장이 구금 상태에 들어가면 그 권한을 대행하도록 법을 바꾸어 비리 단체장의 ‘옥중 결재’라는 꼴불견을 차단했다(46쪽 상자 기사 참조).



지금까지는 검찰 수사말고는 지자체 단체장을 감시할 이렇다할 수단이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단체장 공천권을 가지고 있는 당은 공천을 할 때만 고민하지 선거 이후에는 단체장들을 전혀 관리하지 않는다. 감사원이나 행자부가 이런 지자체의 만연한 비리에 본격적으로 칼을 대기 시작한 것은 최근 일이다. 감사원은 지난해 광역단체를 주로 감사하는 6국만으로는 지자체 감사가 부족하다고 판단해 기초단체를 감사하는 7국을 신설했다.

감사원의 한 관계자는 “현재 기초 지자체의 절반 이상이 감사원 감사를 단 한번도 받지 않았다. 앞으로 모든 지자체를 감사할 방침이다”라고 말했다. 행자부도 지난 1월 지자체의 비리를 밀착 감시할 수 있는 복무조사담당관실을 신설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 창궐하는 개인 비리를 잡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단체장의 비리를 보다 못한 지역 시민단체가 주민이 해임을 결정할 수 있는 주민소환제를 제정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4월 다른 지역에 비해 단체장의 비리 사건이 빈발한 경북 지역 시민단체는 선출직 공직자를 해임할 권한을 주민들에게 달라며 ‘비리 연루 선출직 공직자 소환을 위한 대구경북연대회의’(소환연대)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정치학자나 선거 전문가들은 단체장들이 비리를 저지르는 근본 원인을 선거제도에서 찾고 있다. 1998년 지방선거의 전체 법정 한도 선거 비용은 모두 2천9백60억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돈의 3~4배 가량인 1조원이 선거에서 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민선 2기에서 사법 처리된 단체장 가운데 절반 이상이 선거법 위반자였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정당 관계자들은, 기초단체장은 5억원, 광역단체장은 50억원 정도 선거자금을 쓰는 것이 보통이라고 말한다. 경선으로 단체장 후보를 선출하는 이번 지방 선거에는 1998년 선거보다 두 배 가량 자금이 더 들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광역단체장은 중앙당이 지원하지만 기초 단체장은 모든 것을 후보 자신이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현행 정치자금법상 지구당위원장말고는 대통령일지라도 정치 자금을 모금할 수 없다. 결국 단체장 선거에 나서는 후보는 자기 돈을 쓰거나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런 선거 제도가 단체장 출마 후보를 모두 잠재적인 범법자로 만들고 있다. 남의 돈으로 선거에서 승리해도 신세진 사람의 편의를 봐주어야 하고 또 돈을 들인 만큼 뽑아야 한다는 본전 생각 때문에 비리의 악순환이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정당 관계자들은 정당공천체 폐지나 정치자금 모금을 허용하자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이를 도입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고 말한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수많은 인허가권을 가진 단체장이 후원회를 열면 업자들 가운데 누가 안 올 수 있겠는가”라며 난색을 표명했다. 또 후보자 선출에 당이 개입하지 않으면 중앙당과 하부 조직과의 연결 사슬이 느슨해져 결국 당 조직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단체장 비리를 막을 최상의 방법은 철저한 감시 제도와 시민의 참여라고 말한다. 서울시 송파구청장 시절 투명한 행정으로 유명했던 민주당 김성순 의원은 “지자체의 원칙인 시민 참여를 활성화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즉 시민에게 의사 결정권을 주어 행정 전반에 참여시키면 비리가 발 붙일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단체장이 시민들과 신뢰를 쌓으면 선거에 돈을 쓸 필요가 없고 자연히 눈 먼 돈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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