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라는 이름의 페르조나
  • 정혜신 정신과의원 원장 ()
  • 승인 2002.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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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의 정신탐험/<위기의 남자> 주연 김영철씨
'궁예’로 더 잘 기억되는 탤런트 김영철씨가 자신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드라마(아래 사진)의 제작진과 극의 흐름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모양이다.




중년 남자의 외도를 사실적으로 다루어 꽤 인기가 있다는 드라마인데, 일부 언론에 따르면 그가 ‘부도덕한’ 배역에 불만을 품어 두어 차례 촬영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씨가 정사 행위를 암시하는 장면 등과 관련해 ‘비도덕적 드라마’가 될 수 있다고 건의했다는 말도 들리고, 극 전개가 너무 빨라 인물 설명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궁예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나라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 유형의 하나를 창조해낸 연기자 김영철씨의 이런 행동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진다. 동시에 정신과 의사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털어놓는, 일견 편견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보호자가 어떤 직업인일 때 환자의 상태가 가장 안 좋을 것 같은가?” 정답은 군인·교사·목사이다. 과도하게 일반화했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려운 질문과 대답이지만, 수많은 임상 경험에서 비롯하는 경험칙이 말해주는 결과이다. 물론 개인차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은 직업상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거의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상대방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교사인 아내가 집에서 자신을 학생 다루듯 가르치려 든다며 갈등을 호소하는 남자도 있고, 군인 아버지가 군기 잡듯이 아이들을 다루어 그런 군인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청소년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절대로 목사·교사·군인이라는 직업 자체를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직업들은 ‘직업적 페르조나’가 매우 강한 직업들의 상징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이 집단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본래의 자기 얼굴 위에 쓰는 심리적 ‘가면’을 정신분석학에서는 ‘페르조나(persona)’라고 한다. 페르조나란 본래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말한다. 탈춤에서 어떤 사람이 각시탈을 쓰면 각시 역할을 하고 왕의 탈을 쓰면 왕이 되는 것처럼,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탈을 썼다 벗었다 하며 산다. 자기 명함에 인쇄된 모든 지위나 호칭은 사회적 활동에 필요한 나의 ‘페르조나’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란 가면인 페르조나와 가면 뒤의 진짜 자기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르게 말하면 페르조나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다.
그런데 연기자는 ‘페르조나와의 동일시’가 극점에 이를수록 우대받는 특이한 직업이다. 위대한 배우일수록 극중 역할에 몰두하기 위해 일상 생활에서도 극중 인물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차용한다고들 한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자기가 연기했던 인물에서 정신적으로 빠져나오기가 힘들어 고생하는 연기자가 적지 않다. 궁예 역을 하면서 계속 안대를 착용하는 바람에 멀쩡하던 시력까지 급격히 나빠졌다는 탤런트 김영철. 관심법을 통해 자신의 말 한마디로 모든 사람의 생명까지 좌지우지했던 궁예의 전지전능한 카리스마에서 김영철은 과연 벗어난 것일까.



자기가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에 대한 극의 흐름이나 도덕적 가치까지 재단하는 듯한 김씨의 모습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궁예라는 페르조나와의 동일시를 감지한다면 직업적 호들갑일까. 하기사 사회적 직책이라는 페르조나를 자신의 진상과 동일시하여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수두룩한 현실이니, 배우라는 그의 직업을 감안한다면 호들갑이라고 할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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