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도 발뺌도 상습범”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2.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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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김순경 사건’ 범인, 또다시 범행 저질러 생사람 잡을 뻔
지난 7월30일 밤 9시30분께, 수원에 사는 홍 아무개씨(70)는 병원에 있는 아들 김 아무개씨(37)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서민섭(28·가명)이 또 일을 저질렀어요!” 뉴스를 보다가 전화한 아들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홍씨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10년이 지났어도 어머니와 아들은 서씨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은 10년 전 서씨로 인해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범인으로 몰렸던 ‘김순경’ 모자이다(49쪽 상자 기사 참조).






지난 6월9일 일요일 오전, 서울 공릉동의 한 아파트. “딩동 딩동” 강천우씨(35·가명)는 경비원이 누르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아파트 경비원은 강씨의 어머니 손 아무개씨(75)가 아파트 화단에 놓은 상자를 치워 달라고 말하고 갔다. 강씨는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뻐근했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강씨는 방에서 잠시 텔레비전을 보다가 배가 고파 냉장고가 있는 안방으로 갔다.



안방에는 이불이 넓게 퍼져 있었다. 이불을 걷으니 손씨가 속옷이 벗겨진 채 숨져 있었다. 화들짝 놀란 강씨는 11시40분께 119로 모친이 노환으로 쓰러졌다고 신고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속옷을 입히고 간밤에 같이 술을 마신 동료들에게 전화를 했다. 자기가 몇 시에 집에 들어갔느냐고 물어보았다. 직장 동료 서민섭은 자기가 강씨를 바래다 주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 잠을 잤다고 말했다. 아파트 문은 잠겨 있었다. 누가 들어왔다가 나간 흔적도 없었다. ‘집에는 나밖에 없었는데…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지난밤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어떤 여자가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어 한 대 때린 것 같은 기억이 나는 듯했다. 119 구조대가 와서 인공호흡을 하는 사이 강씨는 자기 방으로 가서 고개를 숙이고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출동한 대원은 강씨의 태도를 이상히 여겼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아파트 내부를 살폈다. 1층 베란다는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방범창이 뜯긴 흔적도 없었다. 일단 최초 목격자인 아들 강씨를 임의 동행 형식으로 경찰서로 데려가 조사했다. 첫날 조사에서 강씨는 “모르겠다. 안 그랬을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기억이 없으니까 강하게 부인하지도 못했다. ‘기억이 없다’는 강씨는 조사를 받은 뒤 귀가했다. 서민섭씨는 태연히 문상을 왔다.



다음날 저녁. 경찰의 재조사에서 강씨는 “내가 그런 것 같다”라고 진술하기 시작했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수사하는 데 애를 먹이지도 않았다. 본인도 ‘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존속 살해 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되었고, 12일 영장 실질 심사를 했다. 판사 앞에서도 강씨는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죄송합니다.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제가 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강씨는 가족 앞에서도 울면서 “내가 한 것 같다”라며 혐의 내용을 시인했다.



경찰은 일단 그를 구속했지만 피의자와 함께 술을 마신 동료들을 상대로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수사를 계속했다. 아무리 필름이 끊긴 상태라 하더라도 강한 자극(살인)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탐문 수사 도중, 아파트 옆집 아줌마로부터 “아침 8시께 쿵하는 소리를 들었다. 서민 아파트여서 방음이 잘 안 된다. 노인네가 나가는 소리인 줄 알았다”라는 증언을 확보했다.



전과 조회 결과, 강씨가 함께 술을 마신 사람 중에서 서씨의 살인 강도 전과가 드러났다. 당시 관할 경찰서였던 관악경찰서로 요청한 서류에는 ‘퍽치기 범인’(노상 강도)으로 나와 있었다(당시 서씨는 퍽치기 혐의로 잡혔다가 자신이 봉천동 여관 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했다. 그후 즉시 검찰이 신병을 인수해 조사했기 때문에 경찰 범죄 기록에는 노상 강도만 남아 있었다).



휴대전화 통화 내역 추적해 진범 체포



사건의 열쇠는 휴대전화 통화 내역이었다. 강씨가 구속된 다음날인 6월13일, 이동통신사에서 받은 자료에는 서씨가 사건 당일 아침 8시30분께 화양리에서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벽 3시30분에 집에 들어왔다는 서씨 어머니의 말은 아들이 시킨 거짓 진술인 것으로 드러났다.



통화 내역을 들이밀자 서민섭은 자기가 범인임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의 옷에서 혈흔이 발견되었다. “사건 전날, 강씨와 오전 2시까지 술을 마시고 강씨 집에 갔다. 아침에 화장실을 다녀 오다 손씨와 마주쳤다. 맨날 술 먹고 돌아다닌다고 야단을 듣고 따지다가 따귀를 맞았다. 흥분해서 주먹이 올라갔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손씨가 죽어 있었다. 침구를 정리하고 아침 8시께 나왔다.” 서씨는 강간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흔적을 남기는 잔인함을 보였다. 경찰은 서씨의 자백을 받자마자 검찰에 석방 지휘 건의를 올렸다. 부모를 죽인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쓸 뻔한 강씨는 무죄로 풀려났다.



사건 전날 두 사람이 술을 마신 호프집 주인은 “소주 4병과 맥주를 마셨다. 강씨는 화장실에서 잠이 들 정도로 만취했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강씨는 이따금 왔는데 말수가 적었고, 나이에 비해 순진한 편이었다”라고 말했다. 뒤늦게 누명을 벗은 강씨는 “어머니는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담당 형사에게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파트에서 살 수 없어 얼마 뒤 거처를 옮겼다.



경찰 관계자는 “서민섭이 김순경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것은 보도를 보고서 알게 되었다. 10년 전에도 남에게 누명을 씌우고 이번에 또 그랬다니…너무 소설 같은 일이어서 당혹스럽다”라고 말했다. 무고한 사람이 다시 한번 억울한 옥살이를 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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