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그리워도 절대 못 가는 신세…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2.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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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송환 거부된 ‘장기수’들의 애절한 망향가
지난 9월8일 적십자회담에서 남북은 면회소를 설치해 이산가족 면회를 정례화하기로 합의했다. 양측은 ‘전향 장기수’와 납북자 가족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추석 같은 명절 때면 장기수와 납북자 가족은 휴전선이 갈라놓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 짓는다. <시사저널>은 생이별한 피붙이를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장기수들과 납북자 가족을 만났다.






지난 9월7일 김영식씨(69)는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원들과 함께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찾았다. 남북통일축구대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경기장을 찾았던 김씨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경기장 앞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인민공화국기는 절대 달 수 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뒤에 있던 한 아이와 아버지의 대화가 들렸다. “아버지, 태극기랑 한반도기랑 어느 깃발을 흔들어요?” “한반도기는 버리고 태극기를 흔들어야지.”


김영식씨는 장기수 출신이다. 철원 바로 위에 있는 강원도 이천이 고향인 김씨는 1962년 3월 안내원으로 남파되었다가 검거되었다. 군사 재판에서 무기형을 받고 26년간 옥살이를 했다. 수형 생활은 혹독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전향 공작(오른쪽 아래 상자 기사 참조)이었다. 1973년 11월부터 2년 동안 끊임없이 고문을 받았다. ‘떡봉’에게 사정없이 몽둥이로 얻어 맞고, 고문틀에 묶여 물고문을 당했다(전향 공작 전담반은 이른바 ‘떡봉’으로 불리는, 같은 교도소에 수감 중인 폭력 사범이다. 이들을 동원해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고문을 가하며 전향을 강요했다). 그들은 한겨울에는 옷을 모두 벗기고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고는 한마디 물었다. “교무과장 만날래, 안 만날래?” “만나겠다”라고 대답하면 그것이 전향이다. 고문을 견디다 못한 김씨는 만나겠다고 대답했다.



전향 무효 선언하고 2차 송환 기다리지만…



1988년 12월 김씨는 출소했다. 2000년 9월 1차 송환 때 그도 북에 가고 싶었다. 북에는 아내(67)와 아들딸이 살고 있다.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고 싶었지만 그는 송환자 명단에 들 수 없었다. 비전향 장기수가 대상이지, 김씨와 같은 전향 장기수는 아예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전향을 하고 싶어 했나 강제로 했지.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이듬해 2월 전향 무효 선언을 했다.” 현재 김씨는 장기수 출신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서울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산다. 낮에는 장기수들이 운영하는 인근 ‘우리탕제원’에서 일을 돕고 있다. 남한에는 친척이 아무도 없다. 그는 2차 장기수 송환을 희망했다.



2000년 9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송환되었다.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여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한다’라는 2000년 6·15 공동선언의 3항에 근거한 조처였다.






지난 9월2일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비전향 장기수 송환 2주년 기념식과 추가 송환을 요구하는 비전향 장기수 2차 송환 촉구대회가 열렸다. 장기수 32명이 송환을 희망했다. 32명에는 김영식씨뿐만 아니라 1차 송환에서 ‘전향했다’는 이유로 제외된 정순택·정순덕 씨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잔혹한 고문을 가하는 전향 공작을 겪고 강제로 전향서에 지장을 찍은 장기수들인데, 지난해 2월 전향 무효 선언을 했다. 이 자리에서 송환을 희망한 박종린씨(69)는 “정부는 송환을 원하는 비전향 장기수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럼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유령인가”라고 말했다.



박종린씨도 1차 송환 때 북으로 가지 못했다. ‘전향’이 굴레였다. 그는 1959년 5월 남파되었다가 1959년 12월 육군 특무대에 검거되었다.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변호사가 필요하다며 내민 전향서에 지장을 찍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심각성을 느끼지 않았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나서 교도소측은 전향 확인을 해야 한다며 공개 성명서 작성을 요구했다. 그는 거절했다. 교정 당국은 그를 비전향자로 여겨 대전교도소로 이감했다. 2년 뒤 교도소측은 공개 성명을 안하더라도 전향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대구교도소로 이감된 박씨는 감옥에서 조직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1976년 2월에 다시 무기 징역을 받았다. 무기 징역을 두 번 받은 셈이다. 그는 위장 전향자라고 해서 다시 비전향자 취급을 받았다.



박종린씨는 35년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93년 12월 출감했다. 문익환 목사 등 교회 쪽에서 보증을 서서 출소할 수 있었다. 출소 후 6년 동안 전남 무안군에 머무르며 중학교 매점에서 자리를 얻어 일했다. 그러던 중 6·15 선언 뒤 송환 얘기가 나와서 ‘북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해 서울로 올라왔으나 공개된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관계 기관에서는 양측 지도자의 약속에 의해 성립된 것이어서 명단에서 뺄 수도 더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이산가족 상봉 대상에서도 제외돼



박씨는 현재 낙성대에서 혼자 거주한다. 중국에 있는 조카와 서신 교환을 통해 북에 있는 아내가 3년 전에 병사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다. 남파되었을 때 생후 석 달이던 딸(44)이 북한에 살아 있다는 전갈도 받았다. “이산가족 상봉 형식으로라도 가족을 만났으면 했으나 나처럼 파견된 사람은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가 아니라는 답변을 듣고 포기했다. ‘전향’ 제도는 일제 시대의 유산이고, 정부도 이 제도를 공식 폐지했다. 전향 여부를 송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박씨는 “80세가 넘으신 분들, 정순덕씨처럼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거동을 못할 정도로 몸이 불편한 분들은 정말 송환을 손꼽아 기다린다”라고 덧붙인다. 그는 올해 추석에는 먼저 돌아가신 장기수들의 묘역을 찾아 성묘할 생각이다.



장기수들은 2차 송환을 원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통일부는 2차 송환 추진에 대해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송환 당시 대상은 비전향 장기수였다. 정부는 2000년 9월2일 북송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전원 송환했다. 이때 못 간 사람은 전향 장기수로 해당 사항이 없다. 이 문제는 종결된 사항이다”라고 못박았다. 한편 대한적십자사 서영훈 총재는 지난 9월11일 “북측이 그동안 존재를 부인했던 국군 포로와 납북 인사를 사실상 인정한 만큼 남측의 비전향 장기수 문제와 연계해서 해결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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