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시카고’의 밤은 처참했다
  • 동두천·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2.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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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기지촌 외국인 여성의 ‘불법 감금·매춘’ 육성 고발
'오늘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날, 밤 10시 한국 경찰과 필리핀 대사관 직원이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우리는 그들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필리핀의) 동료들이 우리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 바란다.’(6월17일) 동두천의 한 클럽에서 3개월 동안 감금당한 마리(가명·22)의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7월19일, 마리는 한국을 떠났다. 그녀는 떠났지만, 타갈로그어로 쓴 그녀의 일기는 남아 있다. 일기는 ‘어글리 코리언’을 단죄하는 재판에 증거 자료로 제시된다.





분노와 체념 얼룩진 ‘마리의 일기’


‘신은 우리와 함께한다. 정말로 돈을 많이 벌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4월1일) 4월2일 마리는 12명과 함께 2개 조로 나누어 방콕을 경유해 한국에 들어왔다. 일행 가운데는 17세인 랙슨(가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방콕을 경유한 것은 비자 때문이다.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방콕에서, 그녀는 한국행 공연예술 비자(E6)를 받았다. 그녀를 채용한 ㄴ프로모션 임 아무개씨가 한국대사관에서 받아낸 것이다. 그녀는 필리핀 송출 업체를 통해서 임씨와 계약을 맺었다. 백지 계약이었다. 임씨는 구두로 월 4백80 달러를 주겠으며, 매춘은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세상에, 여기서 내가 할 일이 매춘이었다. 두렵다. 우리는 손님을 어떻게 즐겁게 할지 모른다. 그래서 첫날부터 사장한테 욕을 먹었다.’(4월2일) 한국에 오자 계약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동두천의 미군 클럽에 간 마리는 3개월 동안 반경 1km인 기지촌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사단 마크를 상징하는 인디언 동상이 자리잡은 미군 2사단 캠프 케이시(camp Casey) 정문 맞은편, 행정구역상 동두천시 보산동인 이곳에는 미군 클럽 50여 개가 밀집해 있다.

1971년 미군 2사단이 옮겨오면서 보산동은 기지촌의 대명사가 되었다. 불법이 판쳤던 알 카포네의 시카고를 연상해서인지, 미군은 이곳을 ‘리틀 시카고’라고 부른다. 1992년 윤금이씨가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곳도 보산동 기지촌이다(윤씨가 살해당한 장소는 도로가 새로 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윤금이씨 같은 한국 여성들은 사라지고, 마리 같은 필리핀 여성이나 러시아 여성 등 외국인 여성이 밤거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1997년 1월부터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현재 외국인 여성 4백여명이 생활한다.


‘우리는 방에 갇혀 나갈 수 없다. 사장과 동행하면 외출이 허락된다.’(4월10일) ‘오늘은 일찍 일을 시작했다. 오전 2시가 되어서야 끝났다’(4월12일) 리틀 시카고의 하루는 오후 5시부터 시작된다. 낮 동안 기지촌은 한산하다. 미군이 부대 밖으로 나오는 저녁부터 거리는 활기를 띤다. 마리는 숙소가 딸린 클럽 안에서 생활했다. 길이 5백m 길 양편에 즐비한 미군 클럽은 대부분 2층이다. 1층은 업소, 2층은 외국인 여성의 숙소다. 단칸방이 있는 2층에서 불법 매춘이 이루어진다. 클럽 46개의 업주들이 가입한 한국특수관광협회 동두천지부 김종구 회장은 “불법 매춘은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김회장은 “한두 군데 업소가 불법을 저지를 수 있지만 모두가 불법 감금과 매춘을 일삼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미니 스커트와 탱크 탑이 유니폼인 마리는 클럽에서 미군에게 주스를 팔았다. 맥주보다 값비싼 주스를 팔아야 월급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계약상으로는 10 달러짜리 주스 한잔을 팔면 3 달러가 그녀 몫이었다. 보통 외국인 여성들은 기획사를 거쳐 업주로부터 급여를 받는다. 필리핀이나 러시아 현지로부터 여성들을 데려오는 기획사는 사후 관리도 책임진다. 한 클럽 사장은 “1명당 80만∼100만 원을 기획사에 준다. 그러면 기획사가 관리비 명목으로 수수료를 떼고 아가씨들에게 월급을 준다”라고 말했다. 업주들이 공식으로 주장하는 기본급은 최저 48만원선.

여기에 주스 값과 팁이 붙는다. 마리를 데려온 기획사도 부산에 본사를 둔 ㄴ사. 동두천지부 사무실은 마리가 감금당한 클럽의 2층에 붙어 있다. 기지촌에 아가씨를 공급하는 기획사만 동두천에 3곳이 성업하고 있다. 마리의 또 다른 수입원은 ‘바 파인(bar fine)’이라 불리는 티켓이다. 미군은 ‘바 파인’을 끊고, VIP 서비스를 받는다. 그녀는 2층의 VIP 룸이나 모텔에서 매춘을 강요당했다.


“한국인들은 모두 섹스광이다”


‘내 가슴을 만졌던 사장의 친구가 또 왔다. 사장은 내게 그와 함께 나가라고 했다. 나는 어떤 한국 사람도 믿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모두 섹스광이다.’(4월17일) 미군이 부대로 돌아가면, 마리는 한국인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접대했다. 거부하면 그녀에게 욕설과 폭행이 돌아왔다. 주스 판매율이 떨어지면, 벌칙으로 아침 8시까지 꼬박 무대에 서 있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사장 박 아무개씨로부터 단 한푼도 받지 못했다. 동료 엘레나(가명·24)는 강요된 매춘을 하다 임신했다. 사장은 낙태에 필요한 치료비를 엘레나의 월급에서 뺐다. 마리는 밥값으로 1주일에 만원씩만 받았다. 참다 못한 일행 가운데 4명이 탈출을 시도했다.


‘도망간 4명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사장은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그는 도망친 애들을 찾기 위해 미군 병사에게도 돈을 주었다. 그가 두렵다.’(4월21일) 도망간 마리의 동료들은 붙잡혔다. 마리의 표현대로 그들에게는 불행만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은 미애와 앤의 핸드폰을 박살냈다. 그는 짐승과 같다. 그는 우리의 사물함을 뒤졌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5월19일)





마리의 인권이 짓밟히는 곳에서 5백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미군의 민사과 분실이 있다. 미군 2사단은 기지촌의 한가운데에 간이 건물을 마련해 두고, 밤 8시부터 밤 12시까지(주말에는 오전 1시까지) 미군 헌병 8명이 3개 조로 나누어 순찰한다. 클럽 밖으로 술병을 들고 나오거나 행패를 부리면 단속 대상이다. 같은 사무실에 한국 경찰도 상주한다. 인근 파출소 순경 1명과 전투경찰이 순찰을 한다. 그런데도 불법 매춘과 인권 침해는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관심은 미군의 안전이기 때문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일기를 쓰며 무수히 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마리. 그녀의 기도가 통했는지, 6월17일 그들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불법 매춘 혐의로 강제 출국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그들 12명은 다행히 체불 임금을 받고 모두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마리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위해 싸워주세요. 교훈을 남겨 나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10월21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이상희 변호사는 마리의 일기장을 첨부해 업주와 기획사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냈다. 이변호사는 “불법 인신 매매에 악용되는 공연예술 비자 승인 절차부터 손질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마리가 떠난 리틀 시카고. 제 2의, 제3의 마리가 잠 못 이루는 밤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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