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 진상 규명
  • 정혜신 정신과의원 원장 ()
  • 승인 2002.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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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애도 반응’의 부작용
얼마 전 일흔을 넘긴 미국인 성직자 두 사람이 한국을 찾았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 고문 조작설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유신 정부에 의해 한국에서 강제 추방되었던 조지 오글 목사와 짐 시노트 신부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과거 독재 정권의 조작에 의해 많은 이들이 고통스럽게 희생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백발이 성성한 두 외국인 성직자의 증언을 들으면서 새삼 ‘과정’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그 끔찍하고 참담한 사건에 대해 누구 한 사람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데, 하루빨리 상처를 잊고 새출발하자며 은근하게 등을 떠미는 사람들까지 있어서다.


‘지연된 애도 반응(delayed mourning)’이라는 정신의학 용어가 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 채 넘어가면 그 슬픔은 잊히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왜곡된 형태의 슬픔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슬픔의 과정을 생략한 부작용이다. 강간당한 여자가 그 분노와 수치심 등을 누군가에게 얘기한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함께할 사람이 없었을 경우 그 분노와 수치, 자기 혐오 감정은 뒤틀리고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어 결국 자신을 포함한 주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역사의 정리에도 이 법칙은 똑같이 적용된다. 슬픔이나 분노의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비극적 사건들은 역사화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처럼 복수의 칼날을 벼린다. 그래서 화합과 관용이라는 명분으로 과정을 생략하다 보면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포크레인으로도 막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최인호의 소설 <영혼의 새벽>에 나오는 한 구절처럼 내게 잘못한 어떤 이를 내가 용서하려면 그 사람이 먼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래야만 유태인처럼 독일인들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이 수반되지 않은 용서는 자칫 블랙 코미디가 될 수도 있다.


참회의 과정 없는 용서는 블랙 코미디


5공 시절, 민통선에서 농사를 짓던 김민기의 경험담이다. 어느 가을 추수를 끝냈는데 갑자기 전두환에 대한 미움이 솟구쳐 올랐단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전두환이 자신이 생산한 쌀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라서다. 분하고 황당한 마음에 불면의 밤을 보냈을 김민기의 괴로움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결국 김민기는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미움의 2분법적 한계에서 벗어났다지만, 이 대목쯤에 슬쩍 “그럼 전두환은 김민기의 그런 괴로움을 알고나 있었을까”라는 구절을 삽입하면 김민기가 겪었을 괴로움과 용서의 과정은 본의 아니게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꼴이 되어 버린다.

혹여 우리가 말하는 용서나 화합은 그런 식이 아닌가. 의문사위 한상범 위원장은 “사람의 죄악을 함부로 용서해 주는 것도 죄악일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역사를 정리하는 데는 피해자의 관용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 않게 가해자의 참회가 필요하다. 그게 바른 순서이고 과정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중 8명은 사형 선고를 받은 지 2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장기 복역 후 출소한 이들 중 5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으며, 생존자 중 일부는 아직도 고문으로 인한 척추장애·대인 기피증 등에 시달리고 있다.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 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해 억울하게 숨진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하도록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의 명예 회복뿐 아니라,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책임 소재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를 바란다. 돈을 딴 사람은 다 빠지고 돈 잃은 사람끼리 남아서 ‘치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새벽녘의 도박판처럼 그렇게 허망한 꼴을 또 볼 수야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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