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의 실체
  • 정혜신 정신과의원 원장 ()
  • 승인 2003.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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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이 게으른 자의 변명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통과 의례처럼 새로운 결심을 한다. 하지만 실행 여부를 떠나 ‘새로운’ 결심 자체가 쉽지 않다. 애초부터 머리 속에 자리 잡은 고정 관념이나 견해가 새로운 생각을 방해하는 까닭이다. 이런 강력한 선입견은 본질보다 현상에 이끌리는 인간의 한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한 성형외과 의사가 외모지상주의에 관련된 좌담회에 참석하고 나오는데, 회의 내내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이 슬쩍 옆으로 다가와서는 병원 위치며 시술비 등에 관해서 묻더란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정신과는 그 반대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은 인간의 심리나 정신에 관해 유별난 관심이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상담실을 찾는 경우는 적다.


의사 출신 소설가 강동우의 <소설 의과대학>에는 선입견의 실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등장한다. 해부학 실습 시간, 학생들이 해부용 시체에 차마 메스를 댈 수 없다고 조교에게 하소연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해부용 시체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여서이다. 그 말을 들은 조교는 메스로 젊은 여자의 코를 단박에 베어 버린 후 이렇게 말한다. “다들, 똑똑히 봐! 지금도 조금 전과 똑같은 감정인가? 들창코를 가진 추녀에게 말야!”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선입견은 갑자기 어두운 극장에 들어섰을 때 내 위치를 가늠하게 하는 희미한 좌석등 같은 것이다. 예측 가능한 단서를 포착해 나의 불안을 줄이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 기제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선입견은 많은 경우 외형적인 요소에서 비롯한다.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자기 성찰이 게으른 자의 변명일 수도 있다.





콘서트 무대 앞에서 미소짓던 시각 장애인


‘외형적’이라는 말을 단지 물리적 차원의 문제로만 이해하지 않는다면 더 그렇다. 선입견의 근거가 되는 고정 관념이나 견해가 실은 ‘내 생각’이 아니라 부모의 생각 혹은 사회에서 학습된 생각일 경우 이것도 외형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남들이 한 번도 하지 않은 나만의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따져보고 의식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래야 선입견의 폐해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연말 나는 조금 서두르고 욕심을 낸 덕분으로 무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조용필 콘서트를 관람했다. 내 옆자리에 시각 장애를 가진 젊은 처녀가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녀를 보면서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현장감을 느끼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비싼 돈을 주고 무대에 가까운 표를 샀다는 것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공연 중간 중간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무대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면서, 무대에 더 가까운 곳에서 조용필의 공연을 보려고 하는 나의 마음이나 그녀의 마음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단지 시각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에 얽매여 그녀의 마음을 놓쳐 버린 나의 무지가 문제였던 것이다. ‘선입견의 실체 인식하기’, 그것이 아직도 어설픈 정신과 의사에 불과한 나의 새해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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