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데로 임한’ 외국인노동자 전용 병원 의사 임형진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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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 전용 의원 임형진 과장, 부와 명예 던지고 ‘인술’ 펴
간호사가 진료 카드를 책상에 놓았다. 정형외과 의사 임형진 과장(44)은 재빠르게 환자 이름부터 살폈다. 위장업(49). 중국인이었다. 위씨가 들어오자 임형진 과장은 중국어로 맞았다. “니하우마.” 위씨 안색이 금방 환해졌다. 동포를 만난 듯 위씨는 아픈 곳을 하소연했다. “허리 아퍼.” 서투른 한국말로 말했다.

임과장은 “언제부터 아팠어요?”라고 물었다. 이때부터 그와 함께 들어온 친구가 통역을 해야 했다. “다리가 아프다.” “언제 발병했어요?” 임과장이 재차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두 다리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통역이 서툴렀다. 임과장은 웃다가 조선족 자원봉사자 박춘례씨(가명·44)를 불렀다. 박씨가 통역을 했다.

다음 진료 카드가 건네지자, 임과장은 또다시 환자 이름부터 살폈다. 이번에는 몽골 출신. 그는 얼른 책상 한쪽을 곁눈질했다. “셈 베노.” 긴장한 채 문을 열고 들어서던 몽골 환자가 빙그레 웃었다. 임과장이 곁눈질한 책상 한쪽에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아쌀라 말레이꿈’ ‘셈베노’ ‘이이 균레르’. 우즈키베스탄·방글라데시·네팔·몽골 등 20여 개국의 ‘안녕하세요’를 뜻하는 말을 한글로 적어둔, 임과장만의 인사말 족보였다. 다른 병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이 종이 한 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눈높이 진료가 시작되었다.

임형진 과장은 서울 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외국인병원·관련 기사 참조)에 둘밖에 없는 상근 의사다. 외국인병원이 문을 연 지 한 달째, 이완주 원장(60)과 함께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완주 원장은 자신이 운영하던 개인 병원을 처분하고 외국인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인 병원을 처분하기는 임과장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그는 올해 마흔넷. 정형외과 개업의로 한창 주가를 날릴 때, 그는 ‘현장’으로 내려왔다. 그것도 1인 2역을 소화하고 있다.

임과장이 원래 속한 병원은 원진레이온 산업재해를 계기로 만들어진 녹색병원이다. 수지 접합 전문의인 그는 녹색병원의 취지에 맞는 적임자였다. 그런데 외국인병원을 추진하던 김해성 목사도 그가 필요했다. 더구나 둘은 고등학교 친구 사이다. 김목사는 그에게 더 낮은 곳으로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고민 끝에 임과장은 두 곳을 오가고 있다. 화·수·금 요일 오후 1시부터 저녁 9시까지 외국인병원에서, 나머지는 녹색병원에서 근무한다. 병원을 운영할 때보다 수입은 3분의 1로 줄었고 호칭도 병원장에서 과장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진료 시간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늦바람 때문이다.
그는 대학을 두 번 다닌 늦깎이 의사다. 원래 그는 문학도였다. 서울대 독어교육과 80학번인 그는 뜨거운 가슴이 앞섰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언더 서클 활동을 한 것이다. 그러나 오지 않은 서울의 봄은 그의 인생도 얼어붙게 했다. 1981년 3월19일 그는 학내 집회에 참가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군사독재 타도하자.’ 대가는 컸다. 곧바로 구속되었고, 제적당했다. 석방되어 보니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마저 해직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집안이 기울었다. 돈을 벌어야겠다며 그는 1984년 가톨릭 의대에 입학했고 1990년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다.

1995년 자기 명의로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남양주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은 곳이다. 손가락이 잘리고 뼈가 부러진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의 병원을 찾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가 잊고 싶었던 어두운 시대의 생채기를 건드렸다.

한번은 이란 출신 노동자가 다리뼈가 부러져 실려 왔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임과장은 이란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치료비 체불 문제로 연락한 줄 알았던 대사관측은 꺼렸다.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전화 통역이 이루어졌다.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불법 체류자여서 치료비만 5백만원이 넘었다. 임과장은 약값만 받기로 했다. 깎고 깎았지만 1백50만원이나 나왔다. 환자에게는 큰 돈이었다.

환자는 한 달 뒤에 갚겠다며 20만원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고는 무소식이었다. 임과장은 돈보다 그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깁스를 제때 풀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임과장이 먼저 수소문해 그를 찾았다. 6개월 뒤 그 이란 노동자는 1백20여만 원을 들고 찾아 왔다. 돈을 받은 임과장은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고 한다. 그 시절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를 치료하며 익힌 노하우가 바로 인사말 족보다. 그 나라 말로 인사말을 건네면, 그 한마디가 외국인 노동자의 불안감을 씻어주었다.

결정적으로 늦깎이 의사의 늦바람을 부채질한 것은 최종길 교수 사건이었다. 임과장은 최종길 교수의 진실을 밝힌 숨은 주인공이다. 의문사 1호 최종길 교수 사건을 맡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유봉인 조사관이 임과장의 서울대 후배다. 유봉인 조사관은 최교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의학적 지식이 막히자, 임과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임과장은 최교수 사건을 의학적으로 파고들었다. 직책도 보수도 없었다.

최종길 교수 ‘죽음의 진실’ 밝혀내

최종길 교수 사건은 그에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게 했다. 문학도였던 1980년이나 의사인 지금이나 그의 심장은 줄곧 뜨겁게 뛰고 있었던 것이다. 의술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베풀고 싶었던 그는 지난 7월1일 병원을 처분하고 현장으로 내려왔다. 어쩌면 돌아온 것이다.

지난 8월13일 금요일, 외국인병원. 임과장은 5분 단위로 밀려드는 환자를 받고 있었다. 환자들 모두 사연이 많았다. 조선족 문경숙씨는 팔이 부러졌지만 병원을 너무 늦게 찾았다. 문씨에게는 치료비 만원도 아까웠다. 경기도 북쪽 의정부에서 서울 남쪽 가리봉동까지 먼 걸음을 한 것도 돈 때문이다. 문씨는 “치료비가 싸고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하다”라고 말했다.

진료 중에도 임과장의 휴대전화는 쉴 틈 없이 울렸다. 전국에서 걸려오는 문의 전화였다. 청주시 한 대학병원에 있는 환자를 그곳으로 옮길 수 있는지 묻는 전화도 있었다. 5층에서 뛰어내린 불법 체류자 환자였다. 회사 동료와 사소한 시비 끝에 경찰 조사를 받자, 추방이 두려워 뛰어내린 것이다. 임과장은 “내게는 오갈 데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두 최종길 교수와 같은 분들이다”라고 말했다.

외래 진료를 마친 그는 입원실로 향했다. 입원실로 향하는 복도는 대낮인데도 깜깜했다. 그는 어두운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판단이 흐리지 않는다는 불혹을 넘긴 그는 복도를 지나 환한 얼굴로 환자들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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