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뇌물 수수, 연 1조원”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4.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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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 액수·수법 상상 초월…“힘 있을 때 챙기자” 인식 번져
지난 8월31일 안상수 인천시장의 ‘양심 선언’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굴비 상자 2개에서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다. 이 굴비 상자는 8월27일 밤 10시께 안시장의 여동생(51)이 사는 인천시 작전동 ㄷ아파트에 한 남자가 놓고 갔다. 안시장은 “동생이 굴비 상자를 받지 않으려 하자 그 남자가 ‘시장님과 얘기가 다 됐다’며 전달했다”라고 말했다.

뇌물을 건넨 사람은 안시장이 동생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서로 왕래가 잦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안시장 여동생은 다음날인 8월28일 현금 2억원이 든 것을 확인하고 8월29일 안시장에게 전달했다. 이 날 중국 출장에서 돌아온 안시장은 이튿날인 8월30일 인천시 감사실 클린센터에 신고했다.

안시장은 ‘2억원 주인’ 안다?

경찰은 이 돈의 상당액이 광주시 4개 은행 지점에서 인출된 사실을 확인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인천시로부터 사업을 수주하기 위한 기업 가운데 호남에 연고를 둔 기업 두 곳이 용의선상에 올라 있다”라고 말했다. 뇌물 공여자는 베일을 벗고 있지만 의혹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안시장 여동생이 낯선 사람이 가져온 굴비 세트를 받은 것부터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많다. 현금 2억원을 넣은 굴비 상자의 무게는 25kg 가량. 50대 초반인 그녀가 굴비 상자를 베란다로 옮기며 무게감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고 보는 것이다. “상자에 얼음을 넣어둔 것으로 생각했다”라는 동생의 말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얼음을 넣어 굴비를 보관하는 방법은 보편적이지 않다.

인천시청의 한 공무원은 “안시장이 평소 행실과 친인척 관리에 문제가 있었다. 자기 혼자 깨끗한 척하려다 애꿎은 시청 실무자만 다치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공무원은 “안시장이 누가 뇌물을 건넸는지 모를 리가 없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짐작한다”라고 말했다.

안시장은 “2002년 7월 취임 뒤 돈을 주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경우가 30여 차례에 이르지만 모두 거절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안시장의 이같은 ‘양심 선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회가 전반적으로 투명해지고 있는데도 유독 공무원 사회에서는 아직도 ‘뇌물’이 오가고 있음을 반증한다.

공무원 사회에서 굴비 상자가 뇌물 상자로 변신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송이 세트’ ‘갈비 세트’ 등 보자기로 싸는 선물 세트도 뇌물함으로 쓰인다. 지난 여름에는 ‘휴가 패키지’ 뇌물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관급 공사를 주로 하는 건설업체 사장 김 아무개씨(45)는 “공무원들이 여름 휴가부터 추석까지를 대목으로 여기고 스스럼없이 손을 벌린다”라고 말했다.

한 해 동안 뇌물죄로 처벌받은 공무원들로부터 추징되는 돈은 평균 100억원에 육박한다. 한 검찰 관계자는 “지난해 기업인 4명 중 1명이 뇌물을 주었다는 통계치가 있다. 뇌물로 건네지는 액수는 추징금의 100배는 족히 넘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올 들어 국세청 공무원에게 금품을 제공한 납세자 15명에게서 거둔 탈루 세금은 3백3억원에 이른다.

정부 중앙 청사에 근무하는 한 공무원은 “공무원이 스폰서에게 용돈을 받거나 뇌물을 받지 않으면 품위 유지가 되지 않는 구조가 문제다”라고 말했다. 한 공기업 인사는 “공무원 사회에서도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졌다. 힘 있을 때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번져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시 건설안전본부 이 아무개씨(6급)는 건설 현장에서 나오는 고철을 뇌물로 받았다. 이씨는 부인과 친척 명의로 고철 수거 및 처리 업체를 운영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해 업체로부터 고철을 챙겨왔다. 이씨는 평소에는 국산 자동차를 타고 다녔지만 주말에는 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골프장을 드나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고철로 돈을 번 이씨를 ‘철강왕’이라고 불렀다.

공무원들이 뇌물을 챙기는 수법은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주식을 뇌물로 받는 것은 기본이고, 은행 대출금을 대신 갚게 하거나 해외 차명 계좌로 돈을 받는가 하면, 휴대전화 요금까지 업자들에게 요구한다. 수표를 받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장사가 잘될 것 같은 유흥업소나 오락실 지분을 얻거나 상가를 분양받는 수법이 각광받고 있다.

공무원끼리 주고받는 뇌물 또한 심각하다. 인사와 감찰 등 힘 있는 부서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건넨다. 행정자치부 한 인사담당자의 부인은 “벨을 누르고는 집앞에 선물을 두고 달아나는 경우가 많다. 현금이 선물로 들어오면 우편환으로 돌려보내는데 우편환 값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다”라고 전했다. 경찰의 한 감찰 관계자는 “아예 집사람에게 명절 1주일 전에는 친정에 가 있도록 한다”라고 말했다.

부패의 선두권에는 지방자치 단체장들도 있다. 단체장들의 부패 사례는 자치제가 뿌리 내릴수록 증가하고 있다. 경기도 안산시장인 박 아무개씨도 지난해 3월 주택업자에게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박씨는 시내 그린벨트 해제 정보를 토대로 친척과 함께 무려 1백17억원을 주고 12만평을 매입하기도 했다. 안산시장은 민선 1기부터 3기까지 모두 사법부의 심판을 받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전북 임실군수 이 아무개씨는 관가에 떠돌던 ‘사삼서오’ 소문을 사실로 입증했다. 이씨는 사무관 승진에 3천만원, 서기관 승진에 5천만원을 받았다. 부인은 물론 오촌 조카까지도 수금에 나서는 등 통로도 다양했다. 이씨는 “지방자치단체장의 70%가 승진 대가를 받고 있다. 나만 문제 삼아 억울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리 따지는 기자에게 “대접하겠다”

민선 2기(1998~2002년) 동안 전국의 광역 및 기초단체장 2백48명 중 22.1%에 달하는 55명이 비리와 연루되어 사법 처리되었다. 이같은 수치는 민선 1기(1995~1998년)의 18명에 비해 3배나 증가한 것이다. 견제를 해야 할 지방 의원들마저 지위를 이용해 이권이나 공무원 인사에 개입하는 사례가 무수히 많다.

지방자치단체는 뇌물 사건이 터지면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하다. 지난 6월 서울 강남구청은 한 간부가 뇌물을 받아 챙긴 혐의로 감사원의 징계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구청은 별 이유 없이 징계를 미루고 있다. 지난해 10월 서울 서초구청 김 아무개 국장은 뇌물을 건네받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아직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시사저널> 제758호 참조) 서초구청측은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라는 입장이다. 서초구청장은 아예 응답을 피했다. 문제가 있다고 따지는 기자에게 김씨는 “나중에 조용한 곳에서 섭섭지 않게 대접하겠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비리 공무원들의 퇴직 급여를 박탈하는 문제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2002년부터 올 7월까지 비리가 적발되거나 재직 중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아 퇴직 급여가 제한된 공무원은 모두 8백56명에 이른다. 액수는 2백57억3천9백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교육청·세관 및 세무서 공무원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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