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한 386인가, 변절한 386인가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4.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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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혁명’ 주창하는 자 유주의 386 운동권의 실체/새 우파 결사체 결성, 여권 386 재집권 저지가 목표
‘위수김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준말이다. 1980년대 중반 이래 운동권 주류 자리를 한 번도 내주지 않던 주사파의 골수들은 김일성을 그렇게 불렀다.’(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 동아일보 8월18일자 ‘시론’)

공안 기구에서 나온 발표문이 아니다. 한나라당 내지 극우 논객 입에서 나온 주장도 아니다. 최근 보수 언론을 통해 봇물 터진 듯 양산되는 주사파 고발기는 1980~1990년대에 운동권에 직접 몸 담았던 핵심 활동가들로부터 ‘고백’ 내지 ‘참회’ 형태로 불거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 일간지는 이를 일러 ‘좌파 386의 커밍아웃’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커밍아웃은 언론 지면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파 성향의 집회나 세미나 현장에서 ‘나의 주사파 참회록’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도 최근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상임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는 ‘북한 민주화 포럼’(상임대표 이동복 전 의원)이 국내에서 첫 세미나를 개최하던 지난 11월1일, 토론자 중 한 사람으로 나온 이동호씨는 “먼저 이 자리에서 반성문부터 쓰고 싶다”라며,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한때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으로 일했다는 그는 단파 라디오로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 투쟁 지침을 전해 듣고, 이 내용을 대학마다 토론 자료로 내려보내곤 했던 옛 일을 털어놓으며 ‘남한의 학생운동과 좌파운동을 지도해 온 실질적 배후는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전대협 전 국장 “학생운동 배후는 북한”

11월5일 <월간 조선>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주최한 이른바 ‘이론 무장을 위한 대강연회’에도 거물급 주사파가 연사로 등장했다. 서울대 82학번으로, <강철서신>을 쓴 김영환씨와 더불어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 주체사상을 처음 이식·전파한 것으로 유명한 홍진표씨가 그 사람이었다. 현재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라는 보수 성향 시민단체에서 정책실장으로 일하는 그는 “이 자리에 나오겠다고 했을 때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절연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말하려는 진실인즉 386 세대가 친북·좌파의 이념 세례를 받았으며, 현재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탈북자들을 통해 북한의 식량난 및 인권 실태를 전해 듣게 되면서 스스로 사상 전향을 하게 되었다는 그는 “지난 20년간 세상이 크게 바뀌었는데도 386 세대는 과거의 낡은 사고 틀을 그대로 붙들고 있다”라고 성토했다. 그는 나아가 “좌파의 극성기는 이미 지났다고 본다. 386 내에서 이런 흐름을 바꿔 보겠다. 386 스스로 사상 개조에 나서겠다”라고 공언해 이 날 모인 50~60대 참석자 5천여 명으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이같은 흐름은 이미 구체화하고 있다. 홍진표씨는 386의 ‘회개’를 공개적으로 촉구하면서 최근 우파 진영의 새로운 스타로 떠오른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와 손잡고 ‘자유주의연대’라는 새로운 386 결사체를 추진 중이다. 오는 11월23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창립식을 갖는 자유주의연대에는 두 사람 외에도 전북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면서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허현준씨,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최홍재씨(현 민주통일시민센터 사무국장) 등 과거 운동권이 다수 참여한다.

낡은 이념 구도를 타파하고 ‘21세기형 자유주의’를 새로운 시대 정신으로 추구하기 위해 모였다는 이들은 스스로를 ‘386을 업그레이드한 486’ 곧 ‘진화한 486’이라 부른다. 자유주의연대 대표로 내정된 신지호 교수는 “진화한 486이 앞장서 새로운 ‘우파 혁명’을 성공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라고 말했다(54쪽 인터뷰 기사 참조). 이를 두고 일부 보수 언론은 ‘386 세대 내부에서 이념적 스펙트럼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일단 이들이 과거 386 운동권 이념에 반기를 든 것은 확실하지만, 이념적 스펙트럼에 분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홍진표·허현준 씨 등 이른바 주사파 그룹은 이미 김영환씨가 ‘공개 반성문’을 쓰고 전향을 선언한 1990년대 말 거의 동시에 공개 전향하고 북한 인권 문제에 천착해 왔다.

흔히 NL(민족민주) 계열로 분류되었던 이들과 달리 이른바 PD(민중민주) 계열에 속했던 신지호 교수 또한 이미 1992년 공개 전향했다. 지금은 민주노동당에 있는 조승수·노회찬 의원 등과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에서 함께 활동했던 그는 동유럽권 사회주의 몰락 이후 ‘고백’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사회주의 포기 및 자유주의로 전향을 공식 선언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움직임이 새삼 눈길을 끄는 것은 보수 일각에서 제기하는 ‘우파 대연합론’ 때문이다. 이를 노골화한 것이 조선일보 전 주필 류근일씨이다. 류씨는 지난 11월2일 ‘전함 12척은 남아 있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여권이 추진 중인 4대 입법으로 인해 현재 이 나라의 운명이 ‘내가 죽느냐 네가 죽느냐의 한 치 틈새도 없는 일대 결전으로 치닫’고 있다며, 나라의 운명을 이렇게 만든 ‘널뛰는 세력’들을 저지하기 위해 ‘아직 남아 있는 전함 12척’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가 ‘최우선 동맹 후보’로 구체적으로 지목한 것이 ‘애국 기독교계와, 이제는 생각이 바뀐 자유주의 386’이었다. 오랜 동맹군이었던 기독교계야 그렇다 치고 보수 진영이 이 새 동맹군에 환호하는 것은 그 상품성 때문이다. 세대 별로 확연히 이념 지형이 갈리는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를 표방한 30~40대 우파 그룹의 출현은 이들에게 한 줄기 단비와 같다. 그러나 이들이 반색하는 더 큰 이유는, 이들 자유주의 386이야말로 ‘적진’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내부자 출신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연대, 류근일·장기표 등과 교감

자유주의 386 또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열린우리당 386 의원 중 전대협 출신을 포함해 10여 명이 주사파였다. 이들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려면 그런 과거부터 고백해야 한다”라며, 여권 내 386을 압박하는 데 1차적인 공격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에 대해서는 논란도 많다. 여권 내 386 출신 의원들은, 이들의 주장을 ‘또 하나의 색깔론’으로 보고 있다. 전대협 초대 의장을 지낸 이인영 의원은 “과거에 집착하는 주장에 대해 더 언급하고 싶지 않다. 대중 조직(전대협)과 사상 서클(주사파 전위 조직)의 룰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와서 왜 그런 주장을 펴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자유주의 386 또한 여권 내 386의 사상 편향을 근본적으로 의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386 주사파 출신 중 아직도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과 달리 홍진표씨는 “아직도 그들이 사회주의를 꿈꾸거나 김일성주의를 추종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과거 문제를 지속적으로 물고늘어지는 것일까? 일단 자유주의연대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과거를 정리해야만 현재의 좌표도 제대로 설정할 수 있다는 원칙론이다. 그러나 이들이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권력 투쟁인 것으로 보인다.

현정권과 여권 내 386을 ‘좌파 포퓰리스트’라고 맹공하는 이들은, 여권 386의 재집권을 저지하는 것이 당면 목표라는 점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목숨을 던질 생각도, 싸움의 노하우도, 자기 정체성도 없는’(‘류근일 칼럼’) 한나라당 같은 야당으로는 권력 탈환이 무망해 보이는 만큼 이 기회에 새로운 우파 결사체를 만들어 상대 진영을 확실하게 제압하고 가자는 것이다. 자유주의연대의 한 관계자는, 이를 위해 류근일씨·장기표씨·김진홍 목사 등 과거 좌파 운동을 했던 선배 세대와 만나 상당 부분 교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류근일씨의 우파동맹론이 뜬금없이 등장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골수 보수파의 장식물로 전락할 수도

더욱이 이념 논쟁의 정점에는 북한 문제가 있다. 이른바 수구 우파와 혁신 우파를 한데 엮는 고리가 바로 북한 문제이다. 홍진표씨는 여권 내 386과 북한 김정일 정권이 각자 권력 유지를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운명공동체가 되어 있다며, 이를 깨고 북한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반북·반김정일 노선에 동의하는 세력이라면 어떤 형태의 좌우 합작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우파대연합론에 대해서는, 그러나 자유주의 386 진영에서도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올 초 <한 386의 사상 혁명>(시대정신 펴냄)이라는 책을 써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김대호씨는 “386 세대가 과거의 사상을 딛고 진화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현정권과 여권 내 386을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386 세대가 이념 세대라는 자유주의연대의 전제부터가 틀려 있다고 주장했다. 386 세대의 주류는 이념보다 현실적 모순에 이끌려 운동을 전개한 측면이 훨씬 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청년기의 경험 때문에 수구 우파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동 세대를 어떻게 설득할지 또한 이들로서는 당장 넘어야 할 벽으로 남아 있다. 동 세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또 한번의 사상 혁명을 실현할 수 있겠지만, 실패하면 결국 구(舊) 우파의 장식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자유주의 386 앞에 놓인 가파른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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