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형 납치’ 시작되었는가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4.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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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심하자 기업인 납치 일삼는 ‘비즈니스 범죄’ 잇달아 터질 조짐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중소기업 회장 일가 납치 사건은 시나리오에 따른 것처럼 착착 진행되었다. 지난 11월9일 오전 6시45분 경기도 양평 대명콘도 인근 야산, ㄷ사 회장 장 아무개씨(77)와 장씨의 부인, 딸 그리고 운전기사 강 아무개씨가 등산로에 도착하자 냉동탑차가 가로막았다. 괴한 6~7명은 미리 준비한 나일론끈으로 장씨 일행의 손을 묶은 뒤 냉동탑차에 태웠다. 그들은 곧바로 서울로 내달렸다.

낮 12시, 장회장이 아들에게 “이유는 묻지 말고 현금 5억원을 준비하라”고 전화를 걸었다. 인질범은 장회장과 함께 오후 3시 서울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 앞에서 장회장의 아들을 만나 서류 상자 3개에 나누어 담은 현금 5억원을 받았다. 그리고는 장회장과 함께 장회장의 차인 렉스턴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 사건은 일반 납치 사건과는 다른 점이 여럿 있다. 가족의 동선을 완벽하게 파악했다는 점, 가족 전원을 납치했다는 점, 냉동탑차를 이용했다는 점, 6~7명이 동원되어 역할 분담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는 점, 장회장의 차량과 휴대전화를 사용했고, 장회장 자신이 돈을 요구하는 전화를 걸도록 했다는 점 등…. 범죄 분석 전문가들은 기존 부녀자·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우발적인 납치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납치 사건 수사 베테랑인 전 용산경찰서 이규환 강력반장은 “완전 범죄를 염두에 두고 해외 범죄 사례를 연구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범행 준비 과정도 정교했다. 주범인 장회장의 전직 운전기사 김씨는 지난 8월 주식으로 1억원을 날리자 범행을 계획했다. 김씨는 인터넷을 통해 공범을 구한 사건에서 힌트를 얻었다. 지난 8월 말 부산에서 강 아무개씨(33)가 인터넷 사이트에 ‘절도단 카페’를 개설해, 회원 4명을 모아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또 지난 6월 서울에서는 ‘폼나게 한탕’이라는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20대 4명이 서울·전북 익산 등을 돌며 성폭행과 강도짓을 저질렀다.

김씨는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인터넷 포털 사이트 ‘우리들의 한탕이닷’이라는 카페의 ‘한 줄 메모’ 난에 수십 차례 글을 올렸다. ‘2명 필요합니다. 두분 합쳐서 5천(만원)이고, 출신지·나이와 차종을 적어서 메일 주세요.’ 공범들과는 온라인 ‘쪽지’를 통해서만 접촉했다. 김씨는 경찰에서 “공범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전화번호 등 개인적인 연락처는 애초부터 서로 교환하지 않았다”라고 진술했다.
김씨는 장회장과 함께 100여 차례 등산을 함께 한 경기도 양평의 한 산책로를 공범들과 함께 수차례 답사했다. 또 납치범들이 장회장의 휴대전화를 사용함으로써 휴대전화 추적을 무력화했다. 이들이 범행 이전에 사용했던 휴대전화는 타인 명의로 개설되었고, 납치 직후 버림으로써 흔적을 지웠다. 한 수사 관계자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현장 예행 연습까지 마쳤다. 특히 사건 이후에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확실히 서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범죄가 지능화·조직화하자 일부에서는 ‘남미형 비즈니스 납치 사건’이 양산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남미에서는 기업인을 납치한 뒤 돈을 뜯는 기업형 납치가 돈벌이의 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유명 인사나 부유층을 상대로 한 납치극이 벌어져 수십 억원을 몸값으로 지불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신문에 오르내린다. 심지어 직계 가족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일어나고 있다. 묘지에서 시체를 파다가 이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유족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엽기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혈통이 좋은 개를 몰래 잡아다 놓고 주인에게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완전 범죄 무산시킨 ‘운명의 4분’

남미에서는 방탄차와 헬리콥터가 불티 나게 팔린다고 한다. 또 공권력을 불신하는 재력가들이 저마다 경호원을 거느리는 바람에 경호사업이 호황을 누린다. 몇몇 전문가들은 사설 경비업체가 호황을 누리고 국내 경비업체 대표주인 ‘에스원’ 주가가 상승하는 것을 이와 관련짓기도 한다. 2만원대에 머무르던 에스원 주가는 지난 9월 3만원대로 올라섰고, 납치 사건이 발생한 지난 주에는 강세를 보였다.

이번 사건을 체감하는 국민의 반응은 경찰과 사뭇 다르다.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납치 범죄가 고개를 드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은 서로 같다. 하지만 경찰 수사가 제자리를 겉도는 데 반해 납치범들이 완전 범죄에 근접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특히 지난 달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선영 묘에서 도굴한 두개골을 미끼로 돈을 뜯어내려는 피의자가 대구에서 자취를 감춘 상태여서 관심은 더욱 커졌다.

네티즌 가운데는 아들이 장회장이 풀려난 소식을 4분만 먼저 알았더라면 완전 범죄가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납치범들은 3시16분 서울 남산 3호 터널 입구에서 장회장과 가족을 풀어주었다. 3시20분, 장회장 아들은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 직후 가족이 풀려났다는 사실을 안 아들은 곧바로 신고를 취소할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사건을 수사 중인 남대문경찰서 주변에는 장회장에게 무언가 약점이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직 운전기사 김씨가 외국으로 도피했다면 완전 범죄가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김씨는 주변의 의심을 따돌리기 위해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당일에도 직장에 출근했다. 하지만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만난 이 아무개씨(28) 등 2명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사장을 납치해 돈을 뜯어내자는 제안을 받았다”라고 제보해 김씨는 덜미를 잡혔다. 공범 가운데 3명의 신원이 확인되어 경찰은 공개 수배에 나설 예정이다. 만약 김씨가 자취를 감추었거나, 범행을 조금만 치밀하게 준비했다면 완전히 묻힐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납치 사건에서 완전 범죄는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중부경찰서 김성구 경감은 “납치 사건은 불가피하게 납치범이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장 주변에서 증거를 꼼꼼하게 수집하면 완전 범죄는 있을 수 없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처리하려다가 증거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납치를 간혹 의뢰받는다는 심부름센터 관련 종사자들도 납치의 완전 성공은 회의적이라고 말한다. 서울 강남에서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이 아무개씨(38)는 “대여섯 명이 투입되었을 때 도피자금, 징역 사는 비용 등을 생각해보면 최소한 10억원이 넘어야 한다. 납치를 해서 감수할 위험보다 큰 이득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그러나 인질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할 경우는 달라진다”라는 단서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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