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려인삼은 없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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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양 인삼과 장뇌삼에 밀려 ‘고사 위기’…국제 시장 점유율 1.6%
‘충격 보고, 서양 삼이 몰려온다!’ 지난 12월21일 서울 강동구 성내동 서울농협지역본부 대강당에서 열린 ‘웰빙 시대, 고려인삼 생산과 경쟁력 제고 전략’ 토론회에서 상영된 비디오의 제목이다. 2002년 KBS에서 방송된 내용인데 최근 웬만한 인삼업계 모임에서는 이 비디오 돌려 보기가 유행이다. 2006년으로 예상되는 수입 개방을 앞두고 인삼업계가 느끼는 위기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중앙대 인삼산업연구센터 임병옥 교수는 “이제 고려인삼은 없다는 말이 현실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충격은 이미 몰아쳤다. 국산 인삼의 10분의 1 가격인 중국삼이 국내에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2월10일 부산세관은 일명 ‘커튼치기 수법’으로 중국 삼 2억원어치를 밀수입하던 일당을 검거했다. 이들은 컨테이너에 건축 자재를 수입한다고 신고해 놓고 앞쪽에 건축자재를 넣어 ‘커튼’을 친 뒤 뒤쪽에 비닐에 넣은 인삼을 대량 밀수입하려다가 검거되었다.

하루 전인 12월9일에는 국내로 밀수해 창고에 보관하던 홍삼 3t을 서울세관이 압수하기도 했다. 관세청은 올 12월에만 4건, 4억3천만원 규모의 인삼 밀수를 적발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단 한 건도 적발된 사례가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만큼 인삼 밀수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관세청 조사총괄과 박천만 사무관은 “수입 물량을 전부 조사할 수 없어 1%만 샘플 조사를 한다. 인삼이 일단 밀수되어 국내에 유통되기 시작하면 국내 삼과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적발이 어렵다. 국내 밀수 유통 조직을 추적하려고 해도 마약 밀수처럼 점조직 형태로 되어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라고 말했다.

밀수도 문제지만, 정식 통관 절차를 거쳐 수입된 인삼이 어디에서 어떻게 소비되는지도 알 수 없다. 국제 협약에 의해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최소시장접근물량(MMA)으로 올해 인삼 56.8t을 수입한 농협 관계자는 “1차 판매처까지는 1년에 두 번씩 점검을 나간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다른 수입 업체들은 1차 조사마저 안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농수산물유통공사 민경후 과장도 “수입 인삼이 소비되는 경로를 추적해 기록해야 하는데 안되고 있다”라며 걱정했다.
수입 백삼 엑기스, 국산 홍삼 엑기스로 ‘둔갑’

지난 12월13일 충남 금산에서 만난 한 인삼 재배 농민은 “지난해 엄청난 양의 백삼 엑기스가 수입되었는데 시중에 유통되는 엑기스 중에는 백삼 엑기스가 하나도 없다. 수입한 전량을 수출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가 값비싼 국내산 홍삼 제품으로 둔갑해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제품이 되면 원료가 백삼인지 홍삼인지, 중국산인지 국내산인지 일반 소비자들이 구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문제 의식은 인삼을 재배하는 농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인삼발전협의회 소속 농민 2천5백여 명은 지난 4월 청와대·총리실·보건복지부·농림부에 ‘인삼 수입 개방을 앞둔 대정부 질의서’라는 제목의 탄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 농민들은 A4용지 5쪽 분량의 탄원서에서 ‘수입된 대량의 인삼이 고려인삼으로 유통되는 것을 개탄한다’며 정부가 철저히 대처하라고 촉구했다. 당시 서명했던 한 농민은 “농림부와 보건복지부에서 회신이 왔으나 그 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제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지쳤다. 정부가 더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2003년에는 백삼 엑기스가 76t(약 29억원어치), 올해는 10월까지 74t(약 38억원어치)이 수입되었다. 밭에서 갓 캐낸 수삼으로 환산하면 8백t 가까이 되는 엄청난 물량이다. 수입한 인삼 품목 가운데 백삼 엑기스가 수량이나 금액 면에서 압도적으로 많다. 반면 2003년에는 57t, 올 10월까지는 50t의 백삼 엑기스가 수출되었다. 물론 수입된 백삼 엑기스가 음료 등의 형태로 변형되어 수출된 경우도 많다. 물량으로 치면 음료 형태로 수출하는 경우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인삼과 관련한 기관들이 일곱 곳으로 분산되어 있는 것도 효과적인 품질 관리를 어렵게 하는 요소다. 인삼산업 일반은 농림부, 인삼 가공제품 검사는 보건복지부, 인삼제품 검사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인삼 제품 개발 연구는 한국식품개발연구원이 맡는 식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이런 일이 있었다.

지난 11월 중순 서울지방 식품의약품안전청 조사과는 서울 시내 여섯 군데 토산품점이 파는 인삼 제품 6점을 수거해 조사한 적이 있다. 안수영 사무관은 “그동안 한 번도 조사한 적이 없어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식약청은 농약 잔류 여부 등을 검사한다. 원산지 문제는 농림부 소관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정에 밝은 한 업계 관계자는 “해당 업체들이 중국산 원료로 제품을 만들어 국산으로 팔고 있다는 말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중앙대 인삼산업연구센터 임병옥 교수는 “기관마다 통계가 다르다. 기본이 안 갖춰져 있다”라고 말했다.
고려인삼보다 장뇌삼 더 높이 평가

해외로 나가보면 사정은 더 심각하다. 한국 인삼은 1990년 홍콩 국제 시장에서 금액 기준으로 22.9%를 차지했었는데 2002년에는 9.6%로 줄어들었다. 물량을 보면 1990년 7.8%에서 1.6%로 줄었다. 1980년대 한국 인삼이 국제 시장 물량의 40%를 차지하던 것은 옛날 이야기이고, 캐나다·미국·중국의 공세에 밀려 고전하고 있다.

물론 고려인삼은 국제 시장에서 미국 삼과 비교해 3배, 중국 삼과 비교해 10배 정도 높은 값에 팔리고 있다. 그러나 고려인삼보다 야생에서 재배한 장뇌삼을 더 높이 평가하는 쪽으로 국제 시장의 흐름이 흘러가고 있다. ‘고려인삼’이라는 이름 하나로 돈을 벌던 때는 지났다. 외국인들이 ‘고려인삼’ 하면 ‘한국산 6년근 홍삼’을 떠올리게 한 것도 문제다. 중앙대 임병옥 교수는 “국내 생산은 백삼 대 홍삼 비율이 85 대 15다. 그런데 수출은 백삼 15 대 홍삼 85다. 홍보나 정책적인 접근이 ‘한국산 6년근 홍삼’이 아닌 ‘한국 인삼’이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인삼은 국내에서 재배하는 농작물 가운데 재배 면적당 부가 가치가 가장 높다. 2002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한국의 10대 상품’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단순한 농작물이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문화 상품 성격이 있다. 더 늦기 전에 정부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브랜드 마케팅’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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