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의 ‘GPS 교란 작전’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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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새 위성항법체계 개발 ‘가속’…미국 ‘민간 서비스 확대’로 견제 나서
스마트 폭탄·순항 미사일·정찰기·탱크·보병의 개인 장비 등 군사용(70쪽 딸린 기사 참조)으로는 물론, 항공 관제로부터 국제 금융 거래 개인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각종 민간 부문에도 두루 쓰이는 ‘위성 항법 체계(satellite navigation system)’를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의 신경전이 뜨거워지고 있다. 위성항법체계의 종주국 미국은 자기네 체계에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라는 이름을 붙였다. 반면 유럽이 개발하려는 위성항법체계의 이름은 중세 유럽의 천문학자 이름을 딴 ‘갈릴레오’이다.

양측의 물밑 싸움은 지난해 3월 유럽 의회가 미국의 기존 위성항법체계에 맞서 유럽의 독자 체계를 개발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면서 점화되었다. 유럽 의회는 1994년부터(당시 ‘유럽위원회’) 위성항법체계 개발 필요성을 모색해 오다가 2002년 3월 이 계획이 ‘정치적으로는 물론 경제·기술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라는 점을 재확인하며 ‘본격 추진’이라는 용단을 내렸다.

위성항법체계의 원조 격인 미국의 GPS는 원래는 군사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핵 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미·소 냉전 시절, 적군의 미사일 격납고(silo)를 공격해 무력화하려는 목적으로 위성항법체계 개발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적군의 미사일(여기서는 대륙간탄도탄) 격납고를 정확히 공격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한다. 미국은 바로 이같은 문제를 무게 862kg짜리 작은 궤도 위성 수십 개를 우주 공간에 쏘아올려 해결하려 했다. 위성에서 지상에 발사하는 극초단파 신호를 되받아 이를 그래픽으로 전환하면 정확하게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위성항법 운영 체계는 크게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우주 공간 구성 요소로, 이는 인공위성을 뜻한다. 미국은 현재 한 궤도에 각각 4개씩, 6개 궤도에 인공위성을 모두 28개(예비용 4개는 별도) 띄워 운용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지상 부문으로, 인공위성이 발사하는 신호를 받아 다른 곳으로 중계하는 일종의 ‘기지국’이다. 현재 미국은 본토의 콜로라도 스프링스와 인도양의 디에고 가르시아 섬 등 전세계에 기지국을 6개 운영하고 있다.
당초 미국 국방부에 의해 군사 분야에만 쓰이던 GPS는 1983년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그 해 9월 미국을 이륙한 대한항공 007기가 항로를 이탈해 옛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가 강제 불시착당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미국이 이 체계를 민간이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민간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오늘날 GPS로 대표되는 위성항법체계는 물·가스·전력·통신에 이어 ‘제5의 공용재(utility)’로 불릴 만큼 일상 생활에서 필수인 ‘산업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유럽연합이 갈릴레오를 개발하기로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이처럼 나날이 확대되는 위성항법체계의 쓰임새 때문이다. 민간 부문으로부터 발생하는 수입은 지난 한 해에만 1백20억 달러 규모로 추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시장 규모가 매년 20%씩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은 처음 유럽연합이 위성 30개를 궤도에 띄우겠다는 갈릴레오 프로젝트 개발을 결정했을 때,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기술력은 그만두고라도, 개발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유럽연합은 당초 개발 완료 시한을 2008년으로 못박으면서, 이에 드는 비용을 모두 ‘3백60억 유로’로 책정했다. 지금까지 유럽연합이 추진해온 공동 사업 가운데는 최대 규모이다.

그러나 가장 큰 난제는 유럽 국가 대부분이 참여하는(갈릴레오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개발 주체는 유럽우주국인데, 여기에는 유럽연합 회원국 외에 스위스·노르웨이 등이 참가하고 있다) 이 대형 프로젝트를 누가 주도권을 쥐고 실행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실제로 주도권을 놓고 독일·이탈리아·스페인 등 열강 사이에 줄다리기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3월, 미국의 전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당시 열린 관계 당사국 회의에서 그동안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주도권(역할) 논란이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위성항법체계 전문 인터넷 매체인 ‘GPS월드’의 지난 5월 보도에 따르면, 주요 골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우주 부문 개발을 독일이 관장하는 대신, 시스템 엔지니어링을 책임지는 제2의 센터를 이탈리아에 설립한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갈릴레오 프로젝트에 대해 논란이 이는 동안, 미국이 팔짱만 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이미 2000년 5월1일부로, 민간 부문에는 사용을 일부 제한했던 GPS 서비스를 개방했다. 당시까지 미국은 ‘선별적 용도(Selective Availabiity)’라는 이름으로 민간 사용자에게는 군사용보다 다소 정확도가 떨어지는 서비스만을 제공했다. 미국은 규제 완화를 통해 급증하는 민간 수요에 부응하고 산업 발전에도 필요하다며 갈릴레오 개발을 강행하려는 유럽연합측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미국의 견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이 갈릴레오 서비스 항목에 ‘공공 규제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장차 군사용으로도 전용될 수 있는 별도의 기능을 추가하기로 하자, 미국의 전문가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논란의 핵심 쟁점은 한층 업그레이드된 군사 기술인 ‘M코드’를 유럽연합이 채택해야 할지 여부이다. M코드는 미국이 주파수 신호 제한을 완화한 데 따른 보완책으로 보잉 사에 의뢰해 개발하고 있는 새 군사용 암호 방식인데, 기존 주파수 ‘L1’(1575.42MHz)을 이용한다. 만약 유럽연합측이 같은 암호 방식을 채택할 경우, 미국과 나토군은 적과 아군의 주파수를 구분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게 된다. 미국이 ‘협상할 여지가 없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난해 말부터 불거진 M코드 논란은 최근 들어 다시 불붙고 있다. 주도권 지분 논란을 상당 부분 해소한 지난 3월 회의를 계기로 갈릴레오 계획의 실행 가능성이 탄력을 받으면서 미국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유럽이 끝내 M코드를 고집할 경우, GPS측은 다른 방식으로 치고 나올 수 있다. 이미 그 조짐이 보인다. 데이비드 브런치비그 등 미국측 전문가 3명은 최근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쟁점 분석과 함께 대응책을 제안하는 글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이들 제안의 핵심은 GPS를 강화시키되, 현재 하나로 합쳐져 있는 ‘민간 부문’과 ‘군사 부문’을 분리해 갈릴레오의 도전에 개별 대응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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