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언론 전쟁' 신호탄 쏘다
  • 모스크바/정다원 (dwj@sisapress.com)
  • 승인 200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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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재벌 구신스키 체포…연말 총선·내년 대선 앞두고 ‘일전불사’ 태세
한국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일부 보수 언론이 ‘감정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푸틴 대통령과 언론 간의 갈등이 아예 전쟁 수준으로 격화하고 있다.

지난 8월 말 러시아 언론 재벌이었던 블라디미르 구신스키(50)가 그리스에서 체포되자 러시아 정가와 재계 그리고 언론계는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푸틴 정권이 연말 총선과 내년 대선을 앞두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재계의 선거 개입을 엄중 경고하는 사건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구신스키는 이중 국적을 갖고 있다. 러시아말고도 이스라엘 국적이 있다. 지난 8월21일 구신스키는 한가하게 요트를 즐기려고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출발해 그리스로 여행하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아테네 공항에서 그리스 경찰에 붙잡혀 구금된 것이다. 러시아 굴지의 언론 재벌이었던 구신스키는 자기가 소유한 텔레비전 채널과 신문·주간지 등 언론을 동원해 푸틴 정권과 각을 세우고 반발하다가, 2000년 6월 2억5천만 달러를 불법 착복하고 돈 세탁까지 했다는 혐의로 체포·감금되는 등 수난 끝에 해외로 도피했다. 이후 러시아 당국은 인터폴에 그를 체포해 달라고 요청했다.

구신스키는 체포된 나흘 뒤인 지난 8월25일 그리스의 도밍고 플라사스 변호사를 통해 보석금 6만 유로를 내고 가석방된 상태이다. 그가 러시아로 인도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지난 5월 러시아와 범죄자 정보 교환과 인도 협력에 관한 협약을 체결한 그리스 정부는 러시아측이 요청한다면 신병 인도를 충분히 고려하겠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구신스키가 풀려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가 이해득실을 꼼꼼히 따져볼 것이고, 그리스 당국도 협약에 따라 의사는 밝혔지만 내심으로는 신병 인도를 꺼리고 있다. 미국·이스라엘과의 관계 훼손이 두려운 것이다. 구신스키는 2000년 겨울 스페인에서도 체포된 적이 있는데, 당시 스페인 법정은 러시아 정부가 제기한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무혐의로 석방했다.

구신스키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러시아 정부 눈 밖에 났을까. 그는 옐친 정권 시절 러시아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물이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굴지의 신문·방송사를 틀어쥐고 여론을 좌지우지했다. 2000년 푸틴이 당선될 무렵, 그는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측근 언론인들을 내세워 푸틴 정부를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부정 축재가 들통 나 결국 외국으로 도피해야 했다.

구신스키는 신화적 인물이다. 그의 이력은 몇 가지 단편적인 것 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952년 모스크바에서 유태인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고, 스탈린의 반(反)유태주의 정책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17세 때 공과대학에 입학했다가 육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몇 해 동안 낮에는 연극 연출가로 일하고, 밤에는 택시 운전을 하며 근근히 살았다.

무일푼이던 그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될 무렵, 최초로 미·소 합작 벤처 회사를 설립해 행운을 잡았다. 구신스키는 그 벤처 회사를 기반으로 국유 재산을 헐값에 인수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면서 금융·언론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마침내 40여 기업이 뭉친 ‘모스트 그룹’의 총수로 등극했다. 그룹 중 미디어-모스트에는 엔테베(NTV) 방송과 일간지 <씨보드냐(오늘)>, 그리고 주간지 <이토기(종합)> 등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구신스키에게는 앙숙이 있었다. 라이벌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다. 구신스키처럼 유태인 출신인 베레조프스키는 석유·언론 재벌이면서 동시에 정치인으로서 푸틴을 대통령으로 만든 ‘킹 메이커’였고, 한때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가 옐친 대통령 사임 직후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아나톨리 추바이스를 따돌리고 푸틴을 대통령으로 밀기 위해 ‘체첸 전쟁’을 유도했다는 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베레조프스키는 푸틴이 당선되자, 대통령을 등에 업고 앙숙 구신스키의 엔테베 채널을 자신이 최대 주주로 있던 오에르테(ORT) 채널에 흡수 합병하여 언론을 독점하려는 야욕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전투구는 공멸을 자초했다. 먼저 구신스키의 엔테베 채널은 유명 앵커맨 일부가 새로 설립된 ‘테베(TV)6’ 채널로 옮기면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취재해 명성을 쌓은 타티야나 미트코바 앵커우먼은 엔테베에 그대로 눌러앉았지만, 당시 러시아 최고 시사 평론가로 인정받던 예브게니 키실로프스키는 테베6으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구신스키는 압력을 받고 엔테베 주식을 국영회사인 가스프롬에 팔고 언론에서 손을 떼었다. 한쪽 날개를 잃은 것이다. 반면 베레조프스키는 테베6 채널의 운영권을 떠맡으며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곧 그도 푸틴 대통령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궁지에 몰렸다. 구석에 몰린 베레조프스키는 과거 앙숙인 구신스키와 손잡고 크렘린에 강력히 대항했으나, 결국 둘 다 해외로 도주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번 사건은 푸틴 대통령 지지 세력이 언론의 비판적 논조를 잠재우기 위해 꾸민 음모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구신스키가 소유했던 미디어-모스트 그룹의 엔테베 채널에서 뉴스 주간을 지냈고 현재 ‘에호(메아리)TV’ 편집자인 안드레이 노르킨은 “구신스키를 구속한 것은 러시아 독립 언론들의 활동을 제한하려는 의도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증명하듯 베레조프스키 계열로 정부에 비판적인 일간지 <노비이 이즈베스티야>가 압력을 받아 폐간 위기를 맞았다.

언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재벌들도 긴장하고 있다. 구신스키처럼 떼돈을 번 유코스 그룹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사장과 로만 아브라모비치 시브네프티 사장 등 ‘올리가르흐’(신흥 재벌)들이 불법 축재로 검찰의 수사를 받는 등 푸틴 대통령의 언론 길들이기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거가 임박할수록 러시아 언론계에서는 한바탕 활극이 벌어질 공산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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