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자 죽자 평화도 죽는가
  • 프랑크푸르트 . 허 광 편집의원 ()
  • 승인 200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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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린드 스웨덴 외무장관 ‘피살 후폭풍’…EU, 이스라엘의 강공 못 막아
지난 9월10일, 스웨덴의 차기 총리감으로 꼽히던 외무장관 안나 린드가 괴한의 칼에 찔려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수사 당국은 사건이 난 지 1주일 만에 용의자를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스웨덴에서는 17년 전에도, 당시 팔메 총리가 거리에서 암살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의 범인은 아직까지 잡히지 않고 있다. 유럽 언론들은 이번 피살이 ‘제2의 팔메 사건’이 되지 않을까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한켠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유럽 극우파의 발호, 그리고 최근 급물살을 타고 있는 중동 정세와 연결해 해석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현지 신문 <다겐스 니헤테르>에 따르면, 린드를 ‘민족 배신자’라 부르며 그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환영한다고 웹 사이트에 글을 올린 극우파 조직이 9월6일 스톡홀름 근교에서 국제 회의를 가졌다. 3백50여 명이 모인 이 자리에는, 영국 극우파 ‘전투 18(Combat 18)’과 연결된 벨기에·이탈리아 극우파가 합류했다. 지난해 시라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프랑스 극우파, 또 지난 9월10일 독일 뮌헨에서 체포된 또 다른 극우파 3인조가 그들과 한패이다.
린드의 죽음에는 유럽연합(EU)에서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누구보다 앞장서 왔던 그녀의 정치적 노선이 복선으로 깔려 있다. 그녀는 1980년대 팔레스타인에서 평화운동가로 활동하다가 현 이스라엘 총리인 샤론의 지령으로 체포된 전력이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부시 정부가 아라파트를 협상 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편향 지원하자 그녀는 이를 “중동 평화를 망치는 미련한 짓이며, 미친 짓이다”라고 비난했고,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국제법 위반이라고 공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지난해 그녀는 또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도덕성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공교롭게도 린드가 암살된 다음날인 9월11일, 이스라엘 샤론 정부는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겠다고 밝혔다. 아라파트 암살까지 암시하는 이 결정으로 중동 정세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것이 유럽 언론의 중평이다. 샤론 총리는 아라파트를 제거할 때 뻔히 예상되는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구실로 삼아 ‘반 테러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을 굳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는 9월 초, 샤론의 측근이 갑자기 워싱턴에 가서 체니 부통령을 만났고, 그 후 미국의 입장 변화를 확인했다고 전했다.

‘아라파트 제거’에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는 말이다. 때마침 미국 국무부 아미티지 부장관도 중동 방문 일정을 무기 연기해 중동 전략의 주도권이 강경파에게 넘어간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이스라엘 군부나 우파 언론에서는 최근 ‘아라파트 제거’에 이어 시리아·레바논·사우디아라비아를 경우에 따라 핵무기를 사용해서라도 평정한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9월12일, 아라파트 추방 결정을 재고하라며 내놓은 성명서도 아무 효력이 없다. 아랍 쪽에서 유엔에 내놓은,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요지의 결의안도 9월17일 미국이 반대하고 독일·영국이 기권해 빛을 보지 못했다. 전쟁을 예고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강경 노선에 유럽이 분명하게 반대하지 못하는 것은 암살 사건의 영향으로 반 이스라엘 세력이 위축되었기 때문일까. 유럽의 단결과 중동 평화 지원, 린드가 바라던 꿈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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