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윌슨 게이트’ 불똥, 언론계로 튀나
  • 워싱턴 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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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누설 취재원 색출하려 ‘기자 소환’ 가능성
로버트 노박이라는 저명한 보수 논객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행정부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해 중앙정보국(CIA) 비밀 공작원의 신변을 공개한 뒤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는 ‘범인’ 색출을 위해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연방수사국(FBI)이 백악관은 물론 중앙정보국·국방부·국무부 소속 공무원들을 내사하고 있는 것이다.

초미의 관심사는 비밀 누설자가 누구냐는 것 못지 않게, 이들과 접촉한 기자들에게 과연 소환장이 발부될 것이냐 하는 문제다. ‘언론 자유의 천국’으로 알려진 미국에서 관련 기자들에게 소환장이 발부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부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발레리 플레임이라는 비밀 공작원의 이름을 공개한 관리가 누구인지 알 만한 기자는 최소 6명이다. 가장 먼저 이름을 밝힌 노박을 포함해 NBC 방송의 백악관 출입 기자 앤드리아 미첼, 뉴욕 일간지 <뉴스데이>의 워싱턴 특파원 티모시 펠프스와 넛 로이스가 그들인데, 모두 자기들이 접촉한 관리가 누구인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노박은 “취재원을 공개해야 한다면 언론계를 떠나겠다”라고 공언했다. 미첼은 취재원 보호가 기자 직의 본질이라며 입을 다물고 있다.
이들이 한사코 입을 열지 않는 한 수사 당국은 비밀을 누설할 만한 관리들을 상대로 기약 없이 수사해야 할 처지이다. 우선 수사 대상에 올라 있는 백악관 직원만 해도 2천명이나 된다. 수사 대상인 e메일이나 통화 내역 조회 건수만 해도 개인당 적게는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 건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수사 당국 안팎에서는 사건 해결의 지름길로 해당 기자들에게 소환장을 보내 강제로 입을 열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법무부 마크 코랠로 대변인은 “기자 소환은 마지막 수단이 돼야 한다는 게 우리의 원칙이다”라며 소환장 발부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2년 전 테러 참사 이후 공안 분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존 애시크로프트 법무장관 승인 아래 소환장이 발부될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2001년 애시크로프트 장관은, 텍사스 주의 한 살인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자기가 접촉했던 취재원을 공개하기를 거부한 자유 기고가 바네사 레게트 씨에게 소환장이 발부되도록 승인한 ‘전과’가 있다. 레게트는 당시 취재원 공개 거부죄로 1백68일간 옥살이를 했다. 애시크로프트는 또 같은 해 로버트 토리첼리 연방 상원의원에 대한 비리 수사를 취재하던 AP통신 존 솔로몬 기자에 대해 집 전화 통화 내역을 제출하라고 소환장을 발부할 때에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수사 당국은 이미 플레임에 대해서는 조사를 마쳤고, 의심 가는 일부 기자들에 대해 스스로 심문에 응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자발적 진술이 성사되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만일 법무부가 그 기자들에게 소환장을 발부해 강제로 법정에 세운다 해도 이들은 미국 수정헌법 1조에 규정된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묵비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끝까지 취재원을 공개하기를 거부한다면 최악의 경우, 법정모독죄로 투옥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같은 경우도 해당 기자들에게는 밑질 것이 없다. 감옥행이 결정되는 순간부터 이들은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 뻔하고, 출판사들은 너도나도 책을 내자며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처벌은 더욱 어렵게 되어 있다. 1982년 제정된 미국의 ‘정보원 보호법’에 따르면, 해당 기자가 소환되어 취재원을 공개하더라도 정보원을 공개한 데 대한 처벌은 기자가 아닌 취재원이 받게 되어 있다. 당시 입법 과정에 참여했던 빅토리아 토엔싱은 최근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기자들은 행정부 관리들과 달리 비밀 정보에 대한 접근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도록 했다”라고 설명했다. 단 예외 조항은 있다. 특정 기자가 ‘상습적으로’ 비밀공작원의 이름을 드러낼 경우 처벌 대상이 된다.

2001년 미국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기자들에게 발부된 소환장은 모두 88건인데, 그 중 17건이 취재원 강제 공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 가운데 몇 건이 법무부 의도대로 풀렸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자들에게 정보를 누설했다고 처벌받은 관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번 플레임 사건의 경우에도 비밀 누설자가 색출되더라도 형사 처벌까지 갈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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