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시라크 ‘화끈 내조’ 누가 막으랴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류재화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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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 태만 바캉스’ 비판 이후 미디어 출연 빈번…내각 인선에도 ‘입김’
미국에 몰아치는 힐러리 열풍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프랑스인들은 새로운 퍼스트 레이디 상을 갈망하고 있다. 하지만 자크 시라크 대통령 부인 베르나데트 시라크(70)는 <누벨 옵세르바퇴르>(10월2∼9일자)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퍼스트 레이디가 다 힐러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못박았다.

그렇다고 마담 시라크가 힐러리의 위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역시 힐러리가 세계 모든 여성들의 깃발이라며 힐러리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마담 시라크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나 될까?

10월 첫 주 프랑스 주요 언론의 표적이 된 것은 다름아닌 마담 시라크였다. 한동안 음지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대통령 부인이 최근 부쩍 바쁘게 움지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9월29일 France3 텔레비전의 노인복지기금 마련 방송이 나간 후, 언론들은 제각각 논평을 쏟아냈다.

이 날 방송은 마담 시라크가 병원 환자와 노인 들을 돕기 위해 1997년부터 벌여오고 있는 캠페인 ‘더 많은 생명을 2003’을 위한 것이었다. 스타들의 애장품을 판매해 수익금을 모으는 이 쇼에서, 마담 시라크는 이례적으로 4시간 동안이나 자리를 떠나지 않고 마이크를 잡았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사회당 주요 인사들은 공공 전파를 남용한 엘리제궁의 정치 쇼라고 일제히 비난했다. 노인 수천 명이 죽어가던 지난 8월 폭염 때는 아무 일도 안 하다가 뒤늦게야 설친다는 힐난이었다.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10월2일자)는 ‘베르나데트 시라크, 새로운 권력에 관한 앙케트’를 머리 기사로 올리고, ‘B플랜이 마침내 개시되었다’며 마담 시라크가 자주 미디어에 등장하는 배경을 분석했다. 8월 폭염 때의 직무 태만에 대한 비난 여론을 수습하느라 찬바람 부는 9월이 되어서야 발동이 걸린 대통령 부인의 ‘행보’에 대해 <르몽드> <리베라시옹> 등은 성적 나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9월의 ‘재시험’에 비유하며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지난 8월 폭염 때, 시라크 대통령 부부는 캐나다에서 3주가 넘도록 바캉스를 보낸 뒤 8월29일에야 공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8월 중순께부터 이미 대통령 내외의 바캉스를 두고 입방아가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의 대표적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만 하더라도 사망자가 속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마당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대통령 부부의 ‘이상한’ 침묵에 의혹을 제기했다. 8월 첫 주에는 그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 목격되었으나, 둘째 주의 행적은 묘연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언론들은 당시 대통령 부부가 머물렀던 캐나다 퀘백 주 노스하틀리 숙소 주방장 등의 증언을 들어가며, 과연 대통령 부부가 계속 캐나다에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더 머물렀는지 등에 관한 의혹을 보도했다. 이런저런 소문이 잇따르자 앨리제궁은 미디어를 단속하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좀더 일찍 돌아왔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르몽드> 기자의 질문에 대통령 부인은 “일찍 온다고 해서 노인들 죽음을 다 막을 수 있었겠느냐”라고 일축했다.

마담 시라크는 프랑스의 옛 귀족 가문인 쇼드롱 드 쿠르셀 가(家) 출신으로서 드 골 장군의 부관을 지낸 인물의 조카이기도 하다. 자크 시라크와 마찬가지로 '파리 정치학교'(일명 '시앙스 포')를 나왔다. 둘은 학생 때 만나 결혼했다. 마담 시라크는 1979년 코레즈 지역 의원에 처음 당선된 후 여러 차례 선출되었으며,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안살림만 돌보는 스타일이 아니라 이미 그녀 자신이 상당한 경력의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며 대통령의 뒤를 보아주는 전형적인 퍼스트 레이디 상에 가까운 베르나데트는 프랑스의 힐러리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정계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통한다. 지난 5월 현 총리 라파랭을 발탁할 때 무게를 실어준 것도 마담 시라크였다. 각 부처 장관들의 면담 신청에 그녀가 시간을 내주느냐 안 내주느냐에 따라 장관들에 대한 평가가 가늠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프랑스 여론은 이같은 마담 시라크의 실력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고 있을까? 프랑스 지면의 만평들은 대통령 남편 챙기랴, 현재 최악으로 입지가 좁혀지고 있는 라파랭 총리 챙기랴, 또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는 대담하고 정력 넘치는 내무장관 니콜라 사르코지의 사기 북돋우랴 바쁘고 고단한 마담 시라크의 활약상을 걸고넘어지고 있다.

프랑스인들이 이런 마담 시라크의 활약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만 보내는 것은 아니다. ‘마담 시라크’가 아닌 ‘베르나데트’로서 독립적인 정치력을 기대하는 여론도 있다. <르몽드>는 최근 ‘마리 앙투아네트’와 ‘베르나데트’를 합성한 ‘마리-베르나데트’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내보냈다. 공식 만찬, 오페라 참석, 대통령 해외 나들이 동반 등 퍼스트 레이디들의 단순한 보조 역할에 종지부를 찍고 정치 일선에 나서고 있는 베르나데트의 행보를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프랑스 언론들은 그녀가 이른바 ‘모권적 부통령상’이라는 다소 애매하고 과도기적인 스타일을 스스로 고안해냈다고 본다. 프랑스 공화국 스타일의 퍼스트 레이디와 영국 여왕의 중간, 혹은 ‘이본 드 골’ 여사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중간 정도를 자신의 정치적 위상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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