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눈 밖에 나면 동티 나는가
  • 모스크바/정다원 (dwj@sisapress.com)
  • 승인 200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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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최대 재벌 호도르코프스키 구속…야당 지원설·대권 도전설로 미운털 박혀
지난 10월25일 러시아 연방안전국(FSB)은 호도르코프스키 ‘유코스’ 석유회사 사장을 긴급 체포했다. 체포는 첩보 작전을 방불케 했다. 중무장한 연방안전국 요원들은 호도르코프스키가 전용 비행기를 타고 시베리아로 출장을 가다가 경유지인 노보시비리스크에 잠시 내렸을 때를 틈타 기습적으로 체포한 후 모스크바로 압송했다.

검찰은 긴 우회로를 거쳐 호도르코프스키를 체포했다. 4개월이 넘도록 그와 주변 인물들의 비리 혐의를 추적한 것이다. 지난 6월19일 유코스 경제안전국 국장인 알렉세이 피추긴을 체포한 것이 신호탄이었다. 4년 만에 붙잡힌 피추긴에게는 메나테프 은행 동료인 올가 코스티나(여)를 죽이려고 한 혐의가 씌워졌다.

이 사건은 유코스를 수색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어 7월2일 유코스 대주주인 메나테프 은행 플라톤 레베제프 회장이 1994년 국영 비료회사인 ‘아파티트’의 주식 2억8천만 달러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검찰의 추적 수사는 계속되었다. 10월17일 유코스 주주인 바실리 샤흐노프스키가 탈세 혐의로 기소되었고, 결국 호도르코프스키 체포로 결론이 났다. 검찰은 호도르코프스키에게 사기·소환 불응·탈세·재산 침해 등 일곱 가지 범죄 혐의를 제기해 수감했다. 그는 열악한 환경으로 악명 높은 모스크바 마트로스카야 찌시나(선원의 고요) 구치소에 구금되었다. 전문가들은 호도르코프스키가 올 연말까지 이곳에 수감될 것이라고 관측한다.

호도르코프스키 체포 사건은 경제 흐름에 민감한 주식 시장을 강타했다. 사건 직후 유코스 주가가 14% 폭락해 70억 달러 정도의 손실이 났고, 이와 함께 1998년 금융 위기 때처럼 팔자 주문이 쇄도해 주가지수(RTS)도 8% 하락했다. 달러화 대비 12% 상승했던 루블화 가치도 1% 하락했다. 유코스 사태는 외국 주식 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런던·베를린·프랑크푸르트에서 유럽 주가가 10% 이상 하락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경제 회생을 위해 표방해온 시장 불간섭, 외국자본에 대한 시장 개방 등 경제 자유화 정책이 후퇴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리처드 바우처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이번 사태는 건전성과 투명성을 지향하고 있는 러시아 경제의 발전을 저해하고 외국 기업인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인들 “체포된 배경에 정치적 이유 있을 것”

이에 대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호도르코프스키 구속 사태로 동요하지 말라고 촉구하고, 10월30일 크렘린에서 외국 투자자들과 만나 “투자자의 권리를 존중할 것이다”라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푸틴은 유코스 사태와 관련한 정치·경제 지도자들의 면담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고, 앞으로 법에 따라 엄정한 수사를 펼쳐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렇다면 호도르코프스키는 과연 검찰이 제기한 범죄 혐의 때문에 체포된 것일까? 국민 여론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에호(메아리) 모스크바’ 라디오가 10월26일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 따르면, 호도르코프스키가 범죄 혐의 때문에 체포되었다고 인정한 응답자가 18%인 반면, 다른 이유가 있다고 응답한 자는 82%나 되었다. 그런 혐의를 받을 만한 사람은 호도르코프스키 외에도 많지 않느냐는 반응인 것이다.

정치 평론가들의 분석은 대략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로, 호도르코프스키가 야당에 정치 자금을 제공한 것이 주된 이유라는 주장이다. 러시아 최대 갑부(재산 80억 달러)인 호도르코프스키는 오는 12월 총선을 앞두고 공산당을 비롯한 야블로코당과 정의연합당(SPS) 등 야당에 정치 자금을 지원해 푸틴 행정부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논리이다.

둘째, 유코스와 미국 굴지의 석유사인 엑손 모빌과의 검은 거래설이다(박스 기사 참조).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미국 석유 메이저인 엑손 모빌과 셰브론 텍사코가 호도르코프스키 구속 이후 유코스 주식 매입 협상을 중단했으며, 크렘린 강경파 중에는 호도르코프스키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익을 대변하는 서방의 대리인이므로 파산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셋째, 크렘린 내 권력투쟁설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호도르코프스키 구속이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 실권자들의 승리라고 보도했다. 즉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연방안전국 국장, 푸틴 팀의 핵심 멤버인 이고르 세친 출판장관, 블라디미르 우스티노프 검찰총장 등 이른바 크렘린 매파가 유코스 수사에 반대해 온 미하일 카시야노프 총리와 알렉산드르 볼로쉰 크렘린 행정실장 등 ‘옐친 가족’을 눌렀다는 분석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푸틴 대통령은 10월30일 볼로쉰 행정실장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메드베제프 드미트리 아나톨예비치를 임명했다. 메드베제프는 푸틴 대통령과 동향이며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법대) 후배로서 크렘린 행정부실장 직책을 맡아온 신주류 핵심 인물이다. 푸틴의 옛 동료인 국가보안위원회 출신 정치인들과 페테르 그룹이 ‘옐친 가족’들을 따돌리고 점차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호도르코프스키 사장의 정치적 야심이 체포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로이터 통신은 호도르코프스키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서 2008년 대선 때는 ‘킹 메이커’가 되거나 아니면, 직접 출마할 수 있다고 전했다. 호도르코프스키의 2008년 대권 도전설은 서방 외교통들의 공통된 관점이다.

<더 모스코 타임스> 신문은 한 발짝 더 나아가 호도르코프스키의 2004년 대권 도전설을 새롭게 제기했다. 호도르코프스키가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푸틴 대통령의 제3의 대항마로 등장해 2차 결선 투표까지 간다는 소문이다. 이 소문의 진원지는 <가지에타> 신문이다. 이 신문은 공산당이 호도르코프스키를 내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논의를 하기 위해 긴급 회의를 열었다고 전했다.

최근 가상 대결 여론조사에서 푸틴 앞질러

보도가 나가자 당황한 공산당은 즉각 논의 사실을 부인했지만, 호도르코프스키가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았다. 유코스에서 4년간(1998-2002년) 근무했고, 현재 공산당 홍보 국장을 맡고 있는 일리야 포노마료프는 “호도르코프스키는 대통령 캠페인에 나서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일단 그가 후보로 등록되면, 그는 소추 면책을 받아 석방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사실 현재 야당에는 푸틴 대통령의 대항마로서 호도르코프스키 만한 인물이 없다. 그만큼 그는 파괴력을 갖고 있다. 최근 ‘에호 모스크바’ 라디오가 청취자를 상대로 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호도르코프스키는 푸틴과의 가상 대결에서 푸틴을 앞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 설문 조사에서 그는 87%를 얻어 푸틴 대통령을 따돌렸고, 유권자 75%의 표를 받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더 모스코 타임스> 신문이 전문가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도 호도르코프스키가 푸틴에게 맞서 출마할 수 있다는 견해가 압도적이었다.

반 푸틴 진영에서는 호도르코프스키가 사업에서 손을 떼고 정치가로 변신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현 정부에 비우호적인 <가지에타> 신문은 ‘러시아 국민은 수난자를 사랑한다’고 부추겼고, 이리나 하카마다 정의연합당 대표는 호도르코프스키의 정치적 변신 가능성을 점치면서 “그가 감옥에 감금된 기간에 비례해서 그의 정치적 입지는 굳어진다”라고 말했다. “수난자를 사랑하는 러시아인들은 그가 신흥 재벌이라는 사실을 잊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반 멜니코프 공산당 부대표는 호도르코프스키를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치켜세우면서, “우리는 이익을 공유할 수 있고, 민주주의를 추진할 사람을 밀겠다”라고 말했다.

푸틴 진영은 호도르코프스키가 공산당·야블로코당·정의연합당을 하나로 묶어 푸틴에게 대항하는 단일 세력을 형성할까 봐 걱정하는 듯하다. 정치 분석가 안드레이 피온초프스키는 “만일 러시아가 경찰 국가로 변한다면, 야블로코당과 정의연합당은 공동 후보를 중심으로 공산당과 연합하려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10월29일 해외로 추방된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도 런던에서 “야블로코당과 정의연합당은 내년 대선에 호도르코프스키를 내세워야 한다. 현재 그들에겐 다른 대안이 없다. 만일 내년 총선에서 푸틴의 당선을 막지 못한다면, 전체주의 정권이 독주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친 크렘린 정치 분석가인 세르게이 마르코프는 호도르코프스키의 출마를 겁낼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 호도르코프스키는 부정 부패로 돈을 쓸어모은 올리가르흐(신흥 재벌)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좋아할 리 만무하고, 또 러시아 국민들이 꺼리는 유태인 혈통이기 때문에 당선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공산당 계열의 일부 정치인들도 러시아는 호도르코프스키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정도로 충분히 자유화한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호도르코프스키를 비롯한 신흥 재벌들이 노리는 1차 목적은 차기 대선이 아니라 푸틴과의 타협을 끌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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