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의 ''김정일 다시 보기''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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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언론, 올브라이트 방북 이후 '미치광이'에서 '실용적 지도자'로 평가 달라져
1994년 6월 중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을 방문했던 리처드 크리스텐슨 씨. 지난 7월까지 주한 미국대사관 부대사를 지내다 국무부의 안식년 혜택을 받아 지금은 워싱턴에 있는 비영리 연구단체 평화연구소.
(USIP)의 선임연구원으로 있는 그는 누구보다 북한의 실상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는 최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보는 미국 언론의 태도가 달라졌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두고봐야겠지만, 현단계에선 그런 것 같다”라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김위원장을 바라보는 미국 언론의 시각은 아직 긍정과 부정 측면이 섞여 있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크리스텐슨 씨의 말대로 요즘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바라보는 미국 언론의 시각은 과거의 부정 일변도와는 많이 다르다. 유력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월26일자 1면에 ‘북한의 김위원장, 미치광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다’라는 큼직한 제목으로 특집 기사를 실었다. <뉴욕 타임스>도 10월31일자에서 ‘모두의 당혹 속에 북한은 웃음 가득하다’는 제목을 단 기사에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문을 계기로 오랫동안 의심을 품어온 회의론자들에게 최소한 미국이 상대할 수 있는 인물임을 인상 깊게 보여주었다’고 지적했다. CNN과 ABC 등 주요 방송 매체들도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올브라이트 장관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그동안 서방 세계에 부정 일변도로 알려진 김위원장의 이미지가 급속히 달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 미국 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 언론들이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 위원장을 바라본 그간의 인식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특히 1983년의 미얀마 아웅산 폭파 사건이나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의 배후에 김위원장이 있었다는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면서 미국 언론들은 그를 ‘테러국의 수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1998년 8월 북한이 일본 열도 상공을 가로지른 대포동 2호 미사일 실험을 강행한 뒤 미국내 주요 언론들은 김정일을 ‘단추 하나만 누르면 언제든 미사일을 쏠 수 있다는 과대망상에 빠진 미치광이’라고 공격했다. 그뿐인가. 김위원장은 금발 미녀들이 모이는 곳에 들락거리는 색정광이요, 구미 영화를 수천 편 모은 수집광이며, 또 작은 키를 가리려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 콤플렉스의 소유자라는 등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횡행한 적도 있다. <뉴욕 타임스> 도쿄 특파원을 지낸 니컬러스 크리스토퍼 기자는 “김위원장은 대체로 광대·플레이보이·가학증 환자·미치광이·철면피적 테러리스트로 묘사되어 왔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올브라이트 장관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이제 김위원장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노회한’ 지도자일지도 모른다고 크리스토퍼 기자는 결론지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법률 고문을 지냈던 미첼 리스 박사도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비슷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올브라이트 장관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김정일 위원장은 그토록 바라던 미국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라고 지적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김위원장에 대해 달라진 시각이 미국 언론은 물론 올브라이트 장관을 수행한 미국 관리들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평양 취재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온 <워싱턴 포스트> 스티븐 머푸슨 기자는 올브라이트·김정일 회담에 배석했던 한 미국 관리의 말을 인용해 “김위원장을 가까이서 봤더니 놀랄 정도로 사물을 훤히 꿰뚫고 있을 뿐 아니라 굉장한 독서가더라”고 전했다. 나아가 김위원장이 “무척 실용적이고 사려 깊으며, 남의 말을 경청했다. 그뿐 아니라 유머 감각이 출중했다. 분명 그는 사람들이 생각해온 것처럼 미치광이는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처럼 김위원장에 대한 미국의 시각이 달라지게 된 결정적인 단서는 지난 6월 중순의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김위원장이 순안공항까지 직접 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하는 장면을 포함해 그가 보여준 일련의 개방적인 행동은 그대로 미국의 신문·방송에 투영되었다. 특히 김위원장이 김대통령을 만나 담소하면서 “구라파에서 나를 은둔이다 뭐다 그런 말을 하는 모양인데, 이번에 김대통령이 방문해서 그런 은둔에서 벗어나게 해줘서 고맙다”라고 재치 있게 한 발언이 미국 언론의 눈길을 끌었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 김대통령이 그를 가리켜 ‘훌륭한 판단력을 소유한 실용적인 지도자’라고 치켜세운 것도 미국 언론들이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유력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6월15일자 외신 난에 ‘김위원장이 껍질 밖으로 나와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다’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지도자를 긍정 평가했다. 또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 미국의 대표적 언론들은 일제히 1면 중앙에 김대통령과 김위원장이 양손을 번쩍 든 채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싣기도 했다.

물론 남북 정상회담 때만 해도 미국 주요 언론들은 김위원장의 진정한 변신 여부를 반신반의했다. 단 한 차례 정상회담으로 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벗겨내기에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국방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북한이 탄도 미사일 계획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한 남북 정상회담을 했다고 해서 김정일이 달라졌다고 볼 수 없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올브라이트 장관의 방북을 계기로 많이 가신 것만은 틀림없다. 무엇보다 미국 국무장관으로는 사상 처음인 그녀의 방북에 미국 기자들이 대거 동행해 취재한 것이 결과적으로 김위원장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지적이다. 김위원장이 올브라이트 장관을 만나 보여준 파격적인 행동이 미국의 주요 매체를 통해 생생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평양 연회 때 그녀가 김위원장에게 ‘언제든 전화하라’고 하자 그가 ‘e메일 주소를 달라’고 되받는 장면은 미국 언론이 김위원장을 ‘유머 감각을 소유한 지도자’로 부각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이다.
‘독재 정권’ ‘테러국’ 이미지는 여전

그렇다면 김위원장에 대한 미국 언론의 시각은 긍정 일변도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김위원장이 올브라이트 장관의 방북, 그에 앞선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그간의 부정적 이미지를 많이 씻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그는 독재와 인권 탄압, 나아가 테러국이라는 오명을 짊어진 나라의 지도자라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최근 ‘김정일의 나라’라는 사설을 통해 ‘올브라이트 장관은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6시간에 걸친 건설적인 회담을 가졌지만, 동시에 그녀는 지도자를 위한 노예적인 개인 숭배가 상존하고, 만성적인 식량난에 기본 생필품조차 부족한 스탈린주의적 나라를 목격했다’고 꼬집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정일과의 축배를’이라는 사설을 통해 ‘올브라이트 장관은 10만명의 노예적 군중이 집단 체조를 벌이는 동안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 독재자 가운데 한 사람과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고 꼬집고 ‘그녀는 15만 북한 정치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공격했다.
이런 신랄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간 식량난과 핵·미사일 문제로 국제 사회에서 대표적인 ‘불량국’으로 지목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미국 언론의 시각이 바뀌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특히 현재 북·미 최대의 현안인 북한의 장거리 탄도 미사일 문제에 조만간 돌파구가 마련되어 클린턴 대통령이 예정대로 임기 안에 북한을 방문할 경우, 김위원장의 이미지는 다시 한번 세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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