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친북 군사평론가 김명철씨의 평양 체류기
  • 김명철 (sisa@sisapress.com)
  • 승인 2000.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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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군사평론가 방북기/식량 배급 10월부터 정상화
북·미 관계가 급변하고 있다. 북한 조명록 특사가 워싱턴을 방문한 뒤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을 다녀갔다. 북·미 간에 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한 깊숙한 논의가 진행 중이며,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북 문제도 숙의 중이다. 북은 이런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해답을 구하기 위해 이같은 미묘한 변화의 시기에 북한에 다녀온 재일 친북 군사평론가 김명철씨의 평양방문기를 싣는다. 남쪽 감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다소 거친 표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북측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유효하리라는 생각에서 되도록 원문 그대로 옮겼다.


북조선 정부의 초청으로 내가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에 도착한 것은 10월7일,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일 사흘 전이었다. 내가 평양을 방문한 것은 올해 2월 이후 8개월 만이다. 나는 17일 평양을 출발해 다시 베이징을 경유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다른 어느 곳에도 가지 않고 10일간 평양에서만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내가 평양에 도착한 다음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서 조명록 차수가 클린턴과 회담하기 위해 워싱턴을 향해 출발했다. 내가 평양에 머무르는 동안 북·미 간의 적대 관계 해소를 위한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내가 일본에 돌아간 뒤 1주일 만에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다. 역사적인 열흘이었다.

현재의 평양에 대해, 북한을 실제로 방문한 사람들이 받는 인상은 아마도 십인십색일 것이다. 각각 다른 인상도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것일 게다. 북한은 경제가 파탄 난 국가여서 구미의 지원을 바라고 문호를 열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바른가. 이같은 시각으로는 북·미 교섭을, 또 남북 교섭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평양의 순안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30분께였다. 최신 설비를 갖춘 허브 공항을 이용해온 구미의 방문자에게는 평양 공항의 모습이 인사치레로 말하더라도 훌륭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왜 북한과 교섭하느라 애쓰는지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여객기를 수용하거나, 점검·정비하는 시설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계에 들어오는 것은 작은 터미널과 제트 여객기 몇 대, 프로펠러기와 헬리콥터뿐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지상 설비가 원시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미국 국방부의 베이컨 대변인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여기에서 우주로 로켓이 날아오르는 것이다. 미국이 보고 있는 것은 레이더에도, 정찰 위성의 초고감도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는 북한의 지하, 북한 국민의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의, 그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의 정치적·군사적 수완인 것이다.

내가 평양에서 지낸 숙소는 평양 시내를 흘러 서해로 물을 쏟아내는 대동강 부근 절벽 위에 있는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멋진 건물이었다.

숙소에서 맛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것은 북한 특유의 녹두 지짐(빈대떡)으로 나는 완전히 그 맛에 사로잡혔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많이 먹는 부침개와는 달리 담백했는데, 건강 식품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 마냥 먹고 싶었다. 녹두 지짐은 일반 가정에도 폭넓게 보급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야생 도라지 한 뿌리를 내어와 먹었다.

숙소의 요리사는 50대 후반 여성인데, 남편은 군인으로 순직했다고 했다. 물어보니 남편이 순직한 경우 그 가정에는 애국 열사의 유족이라는 칭호가 부여되고, 여러 가지 점에서 국가로부터 우선적으로 배려를 받는다고 한다. 그 외 여러 가지로 보살펴준 20대 초반 대졸 여성은 25~26세 때쯤 당원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개 연애 결혼을 하는데, 한눈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한다. 여성은 우선 세 번은 거절하면서 구혼자의 의지를 저울질한단다. 기본은 애국적·혁명적 가치관으로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시 외모도 중요해서 실연하는 사람도 많다. 군대 경험이 없는 남자는 여자에게 외면당한다.

젊은 여성은 군대에 지원해 전투 임무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건설 현장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내가 머무를 때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을 축하해 수만 청년이 인해전술로 서해 남포에서 평양까지 약 40km, 마라톤 경기를 할 수 있는 거리만한 편도 5차선 고속도로를 완성했다.

공사에 참가한 청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로 그것은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이다. 많은 젊은 여성이 무거운 모래부대를 등에 짊어지고 날랐는데 어깨가 다 벗겨지고 부대가 터져 모래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 때 젊은 여성들은 ‘김정일 장군님, 충성의 모래를 한톨이라고 흘리고 싶지 않으니 새 부대를 보내 주세요’라고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것을 읽고 김정일은 굵은 눈물방울을 흘렸다고 한다.

숙소에서 나는 보살펴주는 젊은 접대원에게 현재 북한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첫째는 전국 콘테스트를 하는 음악 프로그램으로서, 즉석에서 합격 불합격 결과가 발표되고 심사원으로부터 구체적인 평가도 듣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가정>이라는 프로그램인데 ‘고난의 행군’ 시대에 나타난 일부 간부 가정의 귀족화 현상을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사회적 지위가 크게 다른 가정 출신 젊은 남녀의 연애와 결혼 문제가 얽혀 있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면서도 심각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이 높이 평가한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숙소 가까운 도로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한 무리의 병사와 만나 30분 정도 잡담을 나누었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했다고 했다. 쉬는 시간에 술을 먹느냐고 물었더니 “우리들은 혁명 군대다. 제대하는 날까지는 일절 마시지 않는다”라고 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까운 마을 사람들에게 군대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군대에서는 누구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평양 시내 교외 나무에는 까치집이 많았다. 숙소 주변 숲에는 딱따구리를 비롯한 작은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산돼지나 노루도 있다고 한다. 숙소 가까운 숲속에서 이리처럼 생긴 커다란 동물을 발견하고 쫓아가 보았지만 정체는 확인하지 못했다.

평양 교외에 사는 동서와 근방의 주민, 정부 관계자의 얘기가 모두 일치했는데, 식량 배급이 전면적으로 부활한 것 같았다. 9월은 평양, 9월 하순부터 10월 하순에는 북한 전역에서 배급이 100% 부활했는데, 쌀이 70%, 옥수수류가 30%라고 한다. 평양 시내를 오가는 사람이나 어린이, 농촌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지난 2월에 왔을 때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 보였다.
평양 시내에서는 새로운 메기탕 집이 곳곳에 문을 열어, 매일 5t씩 메기가 소비되고 있다고 한다. 또 당시 북한은 10월10일 조선노동당창건기념일을 전후해 약 1주일간 연휴가 계속되는, 일본 식으로 말하면 골든위크 상태였다. 평양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가 축제 분위기였다. 도로변에는 소프트크림·우동·도넛·녹두 지짐 가게가 서고 밤 10시 무렵까지 영업했다. 매점 앞에 줄을 서서 음식을 사 먹고 있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으로 방영되었다.

이 골든위크 기간에 평양 시내 거리가 불을 밝혀 동화의 나라 같은 이미지를 연출해 북한 국민은 실로 수년 만에 백만 달러짜리 야경을 즐겼다. 내가 머무를 때는 한 번도 정전이 없었다. 물어보니 대부분의 도에서 수천의 중소 규모 수력·풍력·화력 발전소를 세우고 가동해 국가 중앙 발전소와의 배전선을 끊고 자력으로 전력 공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력 사정이 상당히 호전된 모양이다. 수해로 침수되었던 탄광의 갱도도 배수가 거의 완료되었다.

결국 식량 배급이 거의 5년 만에 전면 재개되고, 전력 사정도 개선되어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는, 6·25 전쟁을 능가하는 경제적 위기를 뚫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을 맞았던 것이다. 평양 시민과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1990년대는 시련의 연속으로, 1995년 이후는 글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1989∼1991년 국제적으로 사회주의 시장이 소멸하면서 구상 무역이 어려워지고, 석유 수입은 가장 많을 때의 연간 5백만t에서 100만t으로 급감했으며, 공장은 조업을 대폭 축소하거나 가동을 정지해야 하는 지경으로 몰렸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이 이런저런 정치적·군사적 압력을 가해 사실상 동맹국도 없는 상태에서 단독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1993∼1994년 북·미 군사 대결은 전쟁 전야의 일촉즉발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다. 1994년에는 건국의 아버지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부터 수해 등 재해가 매년 북한을 습격했다. 배급은 사실상 중단되고, 국민은 굶주렸다. 김정일은 북한 국민과 땅만을 믿고 군을 전면에 내세워 미국과 핵전쟁을 불사한다는 결사의 각오를 굳히고 이 국난을 강행 돌파해 뛰어넘었다.
이 경제 위기, 식량 위기, 북·미 군사 대결에서 참아내고 승리한 자신감이 숙소 관계자뿐 아니라 정부·조선노동당·군 관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거리의 행인들 얼굴에까지 나타나 있었다.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행사는 다름 아닌 ‘김정일과 북한 인민의 승리 선언’이었다.
이 승리 선언에 특별한 의미를 더한 것은 북한의 넘버3이라고 불리는 조명록 차수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서 10월9∼12일 미국을 방문한 사실, 워싱턴에서 발표된 북·미 공동선언,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방북 계획,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이었다. 임기가 만료되기 직전인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전쟁 상태이며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 찍은 나라를 방문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새 대통령이 곧 결정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는 방북할 필요가 없다.

한반도 5천년 역사에서 초강대국의 최고 지도자나 고관이 이처럼 ‘무릎을 굽히고’ 찾아온 일이 없다. 러시아의 최고 지도자는 지금까지 북한을 방문한 일이 없었다. 하물며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는 일은 매달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저 김일성 시대에조차 없었던 일이다.

평양에 머무를 때 북한의 한 장군은 나에게 “고통스러웠지만 군을 우선시하고 미국 본토를 공격해 날려버릴 만한 힘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 군사력이 없었다면 정치력·외교력도 생기지 않는다. 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처음으로 평양에 왔겠는가. 왜 클린턴이 방북하려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예전에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결국 미국 중앙정보국이 ‘현명한 여우’라고 불렀는데, 정말 그대로이다.

북한 외무성의 어떤 고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정일 총서기가 미국과 군사·정치 교섭을 하고 있는 것은 조국 통일의 최대 장애물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다. 주한미군조차, 미국조차 무력해진다면 남북이 연방 통일을 달성하는 데 시간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

20세기 초에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무장 병력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와 식민 지배를 시작했지만 21세기의 첫 해에는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오는 것이다. 김정일의 군 우선 정책은, 즉 미사일 개발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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