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약으로 다시 불붙은 ‘낙태 전쟁’
  • 변창섭 ()
  • 승인 2000.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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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인공 유산제 RU 486 시판 앞두고 찬반 논쟁 가열… 대선 주요 쟁점으로 떠올라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가 떨어져 이르면 11월 초 시중에 유통될 것으 로 보이는 먹는 낙태약 ‘미페프렉스’(Mifeprex) 때문에 미국 사회가 요즘 벌집을 쑤셔놓은 듯 난리법석이다. 흔히 ‘RU 486’이라고 알려진 이 알약은, 이미 20여 년 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 첫선을 보인 뒤 지금도 전세계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미국 식품의약국의 허가 절차가 까다롭고 낙태 반대 단체들이 조직적으로 방해해 이 약은 얼마 전까지도 미국 소비자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나 식품의약국이 지난 9월27일 마침내 이 약에 대해 시판을 승인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미국 사회를 크게 분열시켜온 낙태 논쟁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이번 식품의약국의 승인 발표가 나기 무섭게 기독교연합 등 반낙태운동 단체들은 맹렬히 규탄하고 나섰는가 하면, 낙태를 여성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해온 전미생명연합과 같은 친낙태 단체들은 두 손 들어 환영했다.

특히 이 문제는 불과 한 달도 채 남겨 두지 않은 대통령 선거와 의회 중간 선거전에서도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미 반낙태론자인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는 자신이 집권하면 RU 486 알약에 대한 시판을 규제할 뜻을 비친 반면, 민주당 앨 고어 후보는 여성의 낙태 권리를 더욱 확대하겠다고 공약한 상태다. 특히 선거를 코앞에 두고 이런 발표가 나온 데 대해 공화당은 이를 낙태 찬성 여성 유권자를 겨냥한 클린턴 행정부의 ‘음모’라고 보는 것 같다.

문제의 RU 486은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한 후에도 낙태를 유발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 1980년 프랑스의 루셀 우클라프 사가 개발한 이 약은 두 가지. 하나는 임신후 7주가 지나기 전에 먹는 미페프리스톤이라는 알약이고, 다른 하나는 이 약을 먹은 뒤 이틀 뒤 다시 복용하는 미소프로스톨이라는 약이다. 순서에 따라 두 약을 복용할 경우 임신해서 7주가 지나기 전에 약 95%의 낙태 유발 효과를 얻었다는 임상 결과가 나와 있다. 다만 이 약을 복용한 여성 1,000명 중 2명꼴로 심한 하혈이나 구토·복통을 경험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미 20년 전부터 유럽에서 시판이 허용된 RU 486이 미국에 상륙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식품의약국은 1983년 비영리 가족계획연구단체인 ‘인구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일단 여성 3백명을 대상으로 이 약을 실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1989년 공화당의 부시 행정부 때 식품의약국은 이 약의 안전성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다며 수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낙태 허용에 긍정적인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은 1993년 마침내 이 약에 대한 수입 금지 조처를 해제하고 보건의료부에 이 약의 실험과 판매 허용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의 프랑스 회사는 1994년 인구위원회측에 RU 486에 대한 미국내 특허권과 판매권을 넘겼고, 인구위원회는 그로부터 2년 뒤 정식으로 이 약의 판매 승인을 식품의약국에 요청했다.

이처럼 낙태 알약을 시판하는 문제를 놓고 오랜 시일이 소요된 데는 한마디로 낙태가 단순히 뱃속의 아이를 ‘지우는’ 행위가 아니라는 인식과 그에 따른 사회적 갈등 때문이다. 낙태는 종교·윤리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 여성의 사회경제적 권익, 낙태를 둘러싼 보수파와 진보파 간의 정치문화적 투쟁, 또 이런 투쟁을 자기편으로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입김이 한데 어우러진 폭발적인 사회 이슈다.

낙태 논쟁에 획을 그은 사건은 1973년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간 ‘로우 대 웨이드’ 사건이다. 당시 대법원은 낙태가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어 1992년 대법원은 거듭 낙태 합법 판결을 내리면서 낙태 허용에 관한 각론적 시행 방안을 각 주 정부에 일임했다. 바로 그 때문에 미국내 대부분의 주 정부는 낙태 자체를 허용은 하되 그 허용 절차를 매우 까다롭게 규정해 사실상 낙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는 은밀한 형태로 지극히 제한된 개인 산부인과 병원에서 행해져 왔다. 게다가 낙태 시술 사실이 알려진 병원들은 빈번하게 낙태 반대 단체들의 공격을 받아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9월 초 <뉴욕 타임스>와 CBS 방송이 실시한 낙태에 관한 공동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 국민 10명 가운데 고작 3명만 낙태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이들 찬성론자 가운데 42%는 낙태를 허용하되 엄격한 제한 규정을 두기를 바랐다.

물론 RU 486이 시판된다고 해서 미국 여성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식품의약국 규정에 따르면, 이 알약을 먹고 낙태를 원하는 여성은 최소한 보름 안에 3회에 걸쳐 담당 산부인과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 한다. 일단 이 약을 처방한 의사는 부작용이 생길 경우 즉시 낙태 수술을 할 의무가 있다. 또 이 알약은 임신 7주를 넘긴 임산부에게는 사용될 수 없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정작 낙태에 대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에 과연 산부인과 의사들이 선뜻 낙태 처방을 해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일단 낙태를 시술하는 병원이나 진료소라고 알려질 경우 낙태 반대 단체들의 끈질긴 공격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내 시 단위 이상 지역 중 86%에 달하는 곳에 낙태를 시술하는 병원 자체가 없다. 따라서 여성 4명 중 1명은 낙태를 시술하는 병원을 찾기 위해 평균 80km를 여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타임> 보도에 따르면, 미국내 낙태 시술소는 1982년 이래 꾸준히 줄어 현재는 전국에 약 2천 곳이다.
또 최근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지난 한 해만 해도 낙태를 제한하는 각종 주법안이 50개 이상 통과되었으며, 약 30개 주가 낙태 행위를 일절 금지하는 법안을 도입했다고 한다. 게다가 연방 의회는 지난 5년 동안 두 번이나 임신 8주 이상 된 태아의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상태다. 게다가 현행 연방 관련법에 따르면, 의료보험회사들은 강간이나 산모의 생명 위협 등 극히 제한적인 경우가 아닌 낙태 시술 행위에 대해 보험 처리를 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미국내 낙태 허용론자들이 식품의약국의 이번 RU 486 시판 승인 발표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 울상을 짓는 것도 낙태를 금기시하는 사회문화적 환경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11월 대선에서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당선될 경우 낙태 허용론자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전망이다. 부시는 식품의약국의 조처를 무효화하지는 않겠지만, 문제의 낙태 알약에 대한 시판 규제 조처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아무튼 이번 식품의약국의 획기적인 조처는 낙태 허용론자들의 승리임에 분명하지만, 낙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마찰은 지금보다 늘면 늘었지 결코 줄어들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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