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는 아직 부활하지 않았다
  • 서승원 (일본 간토가쿠인 대학 조교수) ()
  • 승인 2003.12.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설비 투자·명목 GDP 감소, 소비 위축돼 여전히 ‘불안’
일본 은행정책위원회·금융정책결정회의는 지난 11월20∼21일 경제 및 금융 정세와 관련해 경기가 완만하게 회복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최근 발표된 3/4분기 실질 성장률은 2.2%로, 21개월 연속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다. 한국의 한 일간지는 때맞추어 ‘부활하는 일본 경제’라는 연속 기사를 통해, 일본이 마침내 ‘잃어버린 10년에 마침표를 찍고 있다’는 ‘대담한’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은행의 11월 경기 판단을 곧바로 일본 경제 전반의 부활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시기 상조다. 지난해 일본의 1/4분기 명목 국민총생산(GDP)은 3백67조5천9백87억 엔이었다. 올해 같은 기간의 명목 GDP는 3백67조1천3백95억 엔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니혼게이자이신분>(11월24일자)에 따르면, 2003년 3/4분기 일본의 수출 실적은 59조 엔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으나, 명목 GDP와 소비 지출(2백77조 엔)은 각각 8년 전, 설비 투자(75조 엔)는 2년 전, 공공 투자(26조 엔)는 14년 전 수준에 머물렀다고 지적했다. 경기 회복 지수와 체감 지수 사이에 여전히 높은 벽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소네 야스노리 교수(게이오 대학)는 <시사저널>(2002년 11월28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일본 금융권이 안고 있는 부실 채권 문제의 심각성을 ‘제4기 암 환자’에 비유했다. 하지만 미즈호·UFJ·미쓰비시도쿄·미쓰이스미토모·리소나 등 일본의 거대 은행 그룹이 지난 9월 발표한 중간 결산은, 몇 가지 과제는 남아 있지만 금융 부문 회생이 일단 안정권에 접어들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본 경제의 경기 회복은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아직 아니다’이다. 문제는 설비 투자 수출과 함께 GDP의 주요 항목에 해당하는 소비 부문이다. 약 2백77조 엔으로 일본 GDP의 55%를 차지하는 소비 부문, 그 가운데에서도 개인 소비는 현시점에서 보면 위축될 소지가 더 많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S씨. 39세 남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가전 업체에서 일하는 그는 요즘 우울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지난해 연수입이 그 전해에 비해 5만 엔 적은 7백20만 엔으로 줄어든 것은 그래도 견딜 만했다(소득세·주민세·사회 보험료를 뺀 실질 수령액은 약 6백6만6천 엔). 그러나 2004년 4월부터는 사회 보험료에 ‘총보수제’가 도입된다. 그동안 실질적으로 급료의 8.67%, 보너스의 0.5%를 차지하던 후생연금이 앞으로는 보너스에도 똑같이 6.79%씩 적용되어 13.59%가 급여에서 빠져나간다. 여기에다 건강보험료도 총보수제로 이행된다. 그 결과 내후년 S씨가 쥘 실질 수령액은 현재의 수준에서 다시 18만8천6백 엔이 줄어든 5백87만8천 엔이 된다.

실질 소득 감소는 그대로 소비 위축으로 이어진다. 그는 몇해 전 매달 14만 엔씩, 30년 상환 조건으로 은행 융자를 받아 아파트를 샀다. 은행빚 상환 외에 내년에 각각 초등학교 중학교에 진학할 두 자녀 교육비도 걱정거리이다. 자녀를 수업료가 연 2백만 엔 드는 국제 학교에 진학시킬 생각은 접은 지 오래이며, 부인 반대로 승용차 구입도 포기했다.

S씨 사례는 현시점의 경기 회복이 장기 차원에서 일본 경제의 부활을 위한 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현재 일본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경제 ‘재생’과 국민들의 ‘자신감’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자신감이 부족한 요인으로는 경기의 장기 침체 외에, 전후 50년 동안 일본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군림해온 ‘전후 민주주의론’ 및 ‘전후 평화주의’가 냉전 해체 이후 급속히 호소력을 잃으면서 국가 전략이 표류하는 상황을 지적할 수 있다.

자신감 결여는 경제 재생에 대한 처방전과 관련해서도 나타난다. 논쟁의 핵심은 ‘잃어버린 10년’, 즉 장기 침체의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센슈 대학 노구치 아사히 교수는 장기 침체 원인을 크게 △일본 경제 시스템의 기능 부전에 주목하는 ‘구조 문제 원인론’ △거품 경제 붕괴 이후 불량 채권 처리가 지연된 탓으로 돌리는 ‘불량 채권 지연 문제 원인론’ △부적절한 거시 경제 정책(금융 및 재정)을 운용했기 때문이라는 ‘정책 문제 원인론’으로 분류한다.

이 가운데 구조 문제 원인론과 지연 문제 원인론을 제기하는 그룹은 경착륙을 통한 경제 회생 시나리오를 주장하는 반면, 정책 문제 원인론을 제기하는 그룹은 연착륙을 제안한다.

고이즈미 정권은 ‘구조 개혁 없는 경기 회복 없다’ ‘개혁 없는 성장 없다’는 슬로건 아래 ‘재정 재건’, ‘불량 채권 처리’와 ‘규제 완화 및 행정 개혁’에 주력해 왔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경착륙을 통한 경제 회생 시나리오에 해당한다.

하지만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는 현정권의 개혁 속도가 매우 느리다고 비판한다. 명확한 비전이 없어 여러 개혁이 체계화하지 못하고 개혁 그 자체도 정치가와 관료의 힘겨루기로 인해 형해화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고령화 20년’을 성공적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정부 주도형 성장 모델, 획일성 및 평등주의를 강요하는 기업 중심 사회, 그리고 과거 두 차례(도쿠가와 막부 말기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한 개항과 패전 직후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점령 개혁)에 걸친 외부 압력을 통한 개국 방식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일본형 시스템에 대한 일본 정치권의 감수성은 게이단렌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총선거 직후 <아사히신분>과 도쿄 대학 가바시마 이쿠오 연구실이 공동으로 당선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집권 자민당 의원들은 여전히 종신고용제, 공공 사업에 의한 고용 확보 등을 중시하는 보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최대 야당인 민주당도 국회 해산 전의 개혁적 입장에서 다소 후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헌법 및 안전 보장 분야에서 친미보수화(필자는 이를 ‘제2의 탈아론’이라고 규정)가 급속히 진행되고, 일본형 시스템에 대해 여·야 모두 보수-혁신의 중간 지점으로 이동하는 현상황에서 일본 경제는 과연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일본 경제가 앞으로 게이단렌이 제시하는 방향을 따른다면, 한국 및 주변 국가에도 바람직할 것이다. ‘분출구를 찾는 용암덩어리’ 같은 일본의 네오내셔널리즘이 어느 정도는 ‘지역적 아이덴티티’라는 바다로 흘러들어갈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