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가는 길에 솔솔 부는 치맛바람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3.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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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부인들 각양각색 내조법
내년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야당인 민주당의 대선 예비 주자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덩달아 바빠진 사람들이 있다. 바로 후보의 부인들이다. 공식 후보 지명의 발판이 될 아이오와 주와 뉴햄프셔 주의 예비 선거가 각각 오는 1월19일과 1월27일로 바짝 다가온 상태다. 불과 1%만 인기가 상승해도 후보 낙점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음으로 양으로 활약하는 배우자의 역할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현재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전에 나선 사람은 선두 그룹의 하워드 딘·딕 게파트·존 케리 후보를 포함해 모두 9명. 이들 가운데 미혼인 2명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의 부인은 남편의 유세에 동행하거나 모금운동에 나서는가 하면, 표심을 얻기 위해 나름의 이미지를 구축하느라고 안간힘이다. 이들 대부분은 단순한 내조자 역할을 넘어 남편의 정치적 조언자나 막후 활동가, 적극적인 모금운동가로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내과 의사나 변호사, 억만장자인 자선사업가도 있고 평범한 가정 주부도 있다.

이들은 1991년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빌 클린턴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치맛바람을 일으킨 힐러리 여사(현 뉴욕 주 연방 상원의원)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직간접으로 남편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활동 지나쳐 구설 부르는 경우 많아

이들 중 가장 주목되는 ‘후보 부인’은 딕 게파트 의원의 부인 제인 여사(60). 현재 게파트 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하워드 딘 후보에 이어 존 케리 후보와 치열한 2위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제인 여사는 남편의 공약을 쥐락펴락한다는 구설에 올라 있다. 한때 철저한 낙태반대론자였던 게파트 의원이 찬성론자로 변신한 것이나, 의료 정책에 관한 공약을 만드는 데 모두 부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녀는 최근 AP통신과의 회견에서 “나는 지역구민 처지에서 현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막후 조언가일 뿐이다”라며 스스로의 역할을 축소했다.

지명도에서는 떨어지지만 존 에드워드 후보 부인 엘리자베스 여사(54) 또한 힘이 세다. 그녀는 종종 선거 참모들과 특정 현안을 놓고 토론한 뒤, 그 결과를 남편에게 전달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2000년 대선 때 부통령 후보인 남편과 함께 유세전을 펼쳤던 조지프 리버먼 후보 부인 하다사 여사(55). 냉전 시절 체코 프라하의 한 감방에서 태어나 독일의 유태인 대학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민자 출신인 그녀는, 유세 과정에서 유태계라는 ‘출신 성분’이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된다는 식으로 남편에게 훈수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활동이 가끔 도를 지나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힐러리 클린턴 여사의 비서실장을 지낸 멜라니 버비어 씨는 “후보 부인은 조용한 보조 역할에 머물러야지 전면에 나서면 남편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라고 지적한다. 버비어 같은 자문역들이 이들에게 주는 충고는 ‘따뜻한 일화를 되도록 많이 들려주되 골치 아픈 현안은 피할 것’ ‘당찬 모습을 보이되 연설이 불가피할 경우엔 되도록 짧게, 그리고 유권자의 귀를 즐겁게 할 것’ 같은 내용이다. 이들은 또 남의 구설에 오르거나 논쟁거리에 휘말려 언론의 표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 대표적 사례는 2000년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부인인 티퍼 고어의 ‘팔불출 처신’. 당시 그녀는 입만 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편을 ‘완벽한 후보’라고 치켜세우기 바빴다. 때문에 비서들이 그녀를 자제시키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결국은 실패해 역효과를 냈다. 반면 공화당 부시 후보의 부인 로라 여사는 교사 출신답게 유세지 곳곳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찾아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등 조용한 모습을 보여주어 ‘학부모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같은 맥락에서 한때 선두 후보였다가 딘 후보에게 크게 밀리고 있는 케리 후보의 부인 테레사 여사(64)는 티퍼 고어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그녀는 전 남편인 존 하인즈 전 상원의원으로부터 막대한 부를 상속한 재력가이다. 12억 달러를 보유한 하인즈 재단의 소유주인 그녀는 적어도 자금에 관한 한 남편의 최대 물주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행 때문에 남편의 표를 깎아 먹고 있다. 그녀는 최근 자신의 남편을 포함해 후보 9명이 참여한 후보 토론전을 “시간 낭비일 뿐이다”라고 비아냥거려 유권자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완벽한 후보’인 자기 남편이 굳이 다른 후보들과 토론할 필요가 있느냐는 뉘앙스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 최근 AP통신과의 회견에서는 “누가 알겠는가. 내가 100살까지 산다면 나라고 다른 영부인처럼 세상을 바꾸지 못할 법이 있나”라며 노골적으로 정치 야심을 드러냈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는, 베트남 참전 용사였던 남편이 전장에서 겪은 악몽을 조롱 삼아 얘기해 구설에 올랐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케리 후보측은 최근 그녀의 ‘튀는 언행’을 전담할 ‘언론 담당관’을 붙여주었을 정도다. 인기 잡지 <피플>의 워싱턴지국장인 샌드라 소비에라 씨는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케리 후보측 참모들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테레사 여사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사람이 현재 인기도 1위를 달리고 있는 하워드 딘 후보의 부인 주디스 스타인버그 여사(50)이다. 내과 의사인 그녀는 다른 후보 부인들과는 정반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녀는 정치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최근 자신의 남편이 예비 주자 자격으로 나선 텔레비전 토론조차 보지 않았을 정도다. 그녀는 평소에도 남편과는 정치 얘기를 일절 입에 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설령 남편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대통령 부인’이 아니라 본업인 환자 돌보기에 더 충실하겠다고 밝혀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처럼 정치와 담 쌓고 지내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딘 후보의 소회는 어떨까. 그는 최근 AP통신과의 회견에서 “남편의 직업에 의존하지 않는 여성, 그것이 오늘날 대다수 여성임을 감안할 때 그녀는 진정한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며 부인을 치켜세웠다.

정치분석가들에 따르면 미국 대선 역사상 이른바 ‘배우자 요인’이 후보 지명이나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준 선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 역할이 커지고 유권자 절반 이상을 여성이 차지하게 되면서 후보 부인의 역할은 결코 무시 못할 변수로 꼽혀 왔다. 과연 내년 미국 대선에서는 누가 부인 덕을 보았다는 소리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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