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 “한국처럼 우리도 바꿔!”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2000.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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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들, 중의원 총선거 앞두고 “한국 낙선운동 따라하자”…고령 의원·세습 후보가 주 대상
한국의 ‘바꿔 열풍’이 일본에 상륙했다.

의회 해산 바람이 몰아치고 있던 4월 말, 도쿄 우에노 역 앞을 지나가다 길가에 ‘민중의 힘으로 이런 정치인을 낙선시키자’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행인에게 설문 용지를 배포하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 중 한 사람은 핸드 마이크를 붙잡고 “나가다죠(永田町)의 담합·이권 정치에 레드 카드를 던지자”라고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나가다죠는 의회 등이 자리잡고 있어 일본의 정치 1번지로 불리는 곳이다.

가두 캠페인을 펼치고 있던 한 사람이 자기들은 도쿄 고가네이(小金井) 시에 본부를 두고 있는 시민단체 ‘시민연대, 나미(波) 21’ 소속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한국의 총선이 끝난 직후인 4월17일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가두 선전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시민단체의 대표는 고가네이 시에서 미니 신문 <노비(野花)>를 발행하고 있는 사쿠라이 신사쿠(櫻井善作·65) 씨이다. 사쿠라이 씨는 기자에게 “한국에서 총선연대가 낙선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감명받았다. 담합·이권 정치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도 그런 운동이 꼭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그래서 한국의 총선이 끝난 4월13일부터 낙선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3월 한국을 방문해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을 꼼꼼히 살피고 돌아왔다.

사쿠라이 씨는 이전부터 일본의 정치 정화를 위해 투쟁해 온 시민운동가이다. 1983년 총선거 때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를 낙선시키기 위해 니가타 3구에 출마한 적도 있다. 유권자에게 다나카 전 총리의 금권 정치를 종식시키자고 맨몸으로 호소했지만 당시의 세도가 다나카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좌절을 맛보았던 사쿠라이 씨에게 한국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미 21’은 현재 엽서·팩스·전자 우편을 통해 시민이 선정한 낙선 후보자 명단을 집계하고 있다. 이 명단을 토대로 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구성된 100인 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어 5월 중순께 낙선 후보자 명단을 공표한다. 최종 명단은 공표후 다시 시민의 투표를 거쳐 중의원이 해산되는 6월 초에 발표할 예정이다.“결함 의원 분류해 떨어뜨리자” 시민 나서

중의원 총선거가 6월 말로 다가옴에 따라 일본의 낙선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오사카의 시민 옴부즈만 단체는 지난 4월20일 ‘결함 의원을 낙선시키는 시민연대’를 결성하고, ‘입후보 부적격자 명단’을 작성 중이다. 이 시민연대는 총선거 입후보에 결함이 있는 정치인을 여덟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인터넷에 공표했다.

록히드 사건이나 리크루트 사건 등 부정 부패에 관여한 정치인, 선거구민에게 향응을 제공한 공직선거법 위반 정치인, 자산을 감추거나 정치자금 모금 액수를 허위로 기재한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자, 강간 발언 등과 같은 반 인권적 발언을 한 정치인 등이다. 당선후 곧바로 당적을 바꾼 얌체 의원이나 국회에 출석해 낮잠이나 자는 무능 의원, 병으로 장기 입원하고 있는 고령 의원도 명단에 포함되었다.

오사카의 시민연대는 시민으로부터 제공된 정보를 토대로 입후보 부적격자 명단을 선정한 후, 5월 중순께 명단을 발표한다. 선정된 부적격자들에게는 소명할 기회를 제공하고, 소명 내용을 공개해 중의원 총선거 공시 전에 최종 부적격자 명단을 공개할 예정이다.

수도권 지역 무소속 지방 의원과 시민이 결성한 ‘자공보(自公保) 정권 스톱 수도권 네트워크’는 거대 연립 여당 타도를 운동 목표로 정하고, 연립 여당의 낙선 후보를 시민의 투표로 선정해 공표할 예정이다. ‘담배 문제 정보센터’는 담배업계의 이익 보호에 적극적인 이른바 ‘담배족의원(族議員)’과 헤비 스모커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한 운동에 돌입했다.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이 매스컴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네티즌 사이에 열띤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야후 재팬의 게시판에는 최근 ‘이웃 한국에서 낙선운동으로 상당수 국회의원이 낙선했습니다. 일본에서도 국민의 지지를 받지 않는 공명당의 정권 참가와 모리 내각을 도태시켜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가지 않겠습니까’라는 메시지와 함께 30대 남성이 띄운 <일본에서도 낙선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자>라는 난이 등장했다. 여기에 대찬성이라는 의견을 보낸 한 남성은 ‘지금 이 나라는 대개혁이 필요하다. 우리의 세금을 낭비하고 있는 정치가는 낙선시켜 응분의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참다운 정치가를 배출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마지막이다’라고 절규했다.

하지만 ‘낙선운동은 위법이다, 낙선운동으로 의석이 줄어드는 것은 오히려 야당이다, 낙선운동은 일본 정치 풍토에서는 생경한 것이다’라는 반대 의견도 제시되었다.

일본의 공직선거법은 법률로 정한 방법 이외의 선거 운동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 후보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낙선운동을 전개하지 않는다면 낙선운동 그 자체는 위법이 아니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의견이다. ‘단순히 특정 후보를 낙선시키는 행위는 선거 행위라고 볼 수 없다’는 판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낙선 후보자 명단을 선거 기간에 공표하는 것은 제한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어떤 정치가들이 낙선 후보로 점 찍힐 가능성이 높은가. 각 시민단체의 정보와 네티즌 의견을 종합하면 첫 번째 타자는 고령 의원이다. 한국 총선 낙선 성공률에는 못 미칠 듯

고령 의원의 대표적인 인물은 효고(兵庫) 9구에서 또 출마할 예정인 하라 겐자부로(原健三郞·93) 전 중의원 의장이다. 그는 자민당 최고령 의원인데 ‘죽을 때까지 금배지를 달고 싶다’고 주장해, 전국구 출신 국회의원 정년을 73세로 내리려고 검토하고 있는 자민당 집행부를 당황케 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한 시민단체의 집계에 따르면, 일본의 남자 평균 수명인 77세를 넘은 현직 국회의원이 10명인데, 다음 국회에서는 모두 32명으로 늘어날 추세이다.

이들 고령 의원 중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82) 전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80) 전 총리같이 지금도 정치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의원도 있지만, 대부분은 세비만 축내고 있는 황혼족이다. 일본 시민단체들은 정계의 세대 교체를 촉진하기 위해 이런 고령 의원들을 낙선 대상 후보로 적극 거론할 방침이다.

그러나 고령 의원들이 은퇴를 선언한다고 해서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보면 오산이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76) 전 총리는 자신의 후계자로 동생인 와타루(53)를 지명했고,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74) 전 관방장관은 아들인 히로시(44)를 다음 선거에 내보낼 예정이다. 게다가 올해 80세인 미야자와 전 총리는 다음 선거에서는 전국구로 옮길 예정이나, 자신의 지역구를 조카인 요이치(50)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지금도 의식 불명 상태인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총리의 지역구에서는 후계자로 오부치의 차녀인 유코(28)를 적극 추대하고 있는 중이다.

일본 시민단체들은 이런 식의 정계 은퇴와 후계자 선정은 세대 교체가 아니라 의원직 세습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런 세습 풍조가 금권·부패 정치를 만연시키고 정치를 경직시켜 온 장본인이라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때문에 이런 세습 후보도 시민단체들의 집중 공격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밖에 소속 상임위원회에 관련된 이권 확보에 열을 올리는 ‘족의원’, 각종 추문에 연루된 ‘회색 의원’들도 시민단체 낙선 후보자 명단에서 상위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총선연대가 점 찍은 낙선 후보자들은 실제로 70%가량이 낙선했다. 그렇다면 6월 하순께 치러질 일본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낙선율을 어느 정도 기록하게 될까.낙선운동 선진국인 한국 수준에는 못 미치리라는 것이 대다수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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