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론은 작은 히틀러 부시는 큰 히틀러”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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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현지 취재…“장벽 탓에 땅과 일자리 잃어”
이라크 전쟁에 세계의 관심이 쏠린 사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갈등은 속으로 깊어지고 있다. 현안은 지난해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보안 장벽이다. 지난 10월 유엔은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불법 정착촌을 철거해야 한다’는 총회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이스라엘은 눈 한번 꿈뻑하지 않고 있다. <시사저널>은 현지 취재를 통해 거대한 감옥 안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들여다보았다.

성탄 사흘 전인 지난 12월22일, 한밤중에 산기를 느낀 팔레스타인 여성 라미스 씨(26)는 남편을 깨웠다. 남편 라엘 무스타파 씨는 급히 차를 몰았지만 반드시 걸어서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검문소 100m를 앞에 두고 산모는 힘겹게 발걸음을 뗐다. 50m쯤 걸었을까. 이스라엘군이 접근을 막았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새벽 2시. 사령관은 45분이 지나서야 열쇠를 갖고 나타났다. 산모는 들것에 올려지자마자 도로 한복판에서 첫 딸을 낳았다. 아기는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남편 라엘의 차와 몸을 수색한다고 일행을 놓아주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기 직전 둘째 딸이 태어났다. 의사는 너무 늦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쌍둥이 딸을 잃은 라엘은 기자가 찾아갔을 때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직 몸을 추스르지 못한 산모의 눈밑은 검디 검었다. 라엘은 “그날 밤 군인들이 ‘뭘 도와줄까요’라고 물었다. 난 도움이 필요없다고 외쳤다. 그냥 당신들이 떠나면 된다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이건 나만 당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일이 그들에게는 이미 일상이다. 기자가 팔레스타인의 임시 수도인 라말라를 빠져 나오면서 만난 한 팔레스타인 여성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녀는 “임신부까지 죽는 일이 허다하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스라엘이 ‘보안 장벽(security defence)’이라고 부르는 것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차별 장벽’ 혹은 ‘분리 장벽(apartheid wall)’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일터가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 있는 라말라이지만 집은 예루살렘에 있는 한 팔레스타인 여성은 언제 길이 봉쇄될지 몰라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루 여섯 시간 일하고, 출퇴근에 네 시간이 걸린 적도 있다”라며 힘없이 웃었다. 그나마 그녀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이기 때문에 출입이 가능하다. 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인은 하얀 주민증을, 가자 지구는 파란 주민증을, 요르단 서안 주민은 빨간 주민증을 갖고 있다. 파란색·빨간색 주민증으로는 아예 예루살렘 출입이 불가능하다. 이상한 점은 분명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인데도 치안은 모두 이스라엘군이 맡고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달리 팔레스타인 지역 내의 검문을 맡은 이스라엘 군인의 눈빛은 살기가 등등했다. 팔레스타인의 도로는 오후 6시면 모두 봉쇄된다. 그 때문에 밤에는 누구도 자기가 사는 마을을 벗어나 이동할 수가 없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 사는 이스라엘 민간인, 이른바 정착촌(settelment) 주민들은 모두 총을 소지하고 있다. 유사시 발사할 권한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이스라엘 정착민은 별도 도로를 사용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이 검문소가 막혀 그 길을 이용하려면 무차별 사격을 감수해야 한다.

이스라엘 정착민에게는 총기 발사 권한

집이 검문소 건너편에 있는 17세 소년 아사는 툭하면 이스라엘군에 집을 점거당한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여권을 갖고 있는 아사는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는 ‘퍽킹 아메리칸’이라고 놀리며 식구들을 쫓아낸다.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며 눈을 번뜩였다. 꼬마들의 얼굴은 아직 천진했지만, 10대 소년들의 얼굴에서는 폭발 직전의 분노가 느껴졌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겉만 자치권을 갖고 있을 뿐 자체 치안력이 전무하다. 라말라의 요르단계 은행에서 일하고 있다는 한 남성은 “아무도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는지 관심이 없다. 아라파트도 마찬가지이다. 정치꾼들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라고 냉소했다. 그 곳 주민들은 텔아비브 공항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외국에 나가려면 요르단 암만으로 가야 한다. 그것도 요르단 국민의 신원 보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동행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관리조차도 검문소를 통과할 때면 얼굴이 파래졌다. 그는 기자가 검문에 걸리자 아예 모른 척 곁을 떠났다.

라말라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데어 발루트에는 최근 이런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안티 장벽 캠프가 차려졌다. 12월19일부터 1월 말까지 진행될 이곳 캠프에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활동가 20여 명이 공사가 중단된 학교터를 지키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부터 미국·프랑스·독일 등 각지에서 모여들었고, 이스라엘 활동가도 여럿 눈에 띄었다.
캠프는 자연스레 지역 주민의 구심이 되었다. 지난 12월23일 밤, 근처의 팔레스타인인 수백 명이 모여 대책 회의를 가졌다. 며칠 전 이스라엘군이 몰려와 측량을 하고는 빨간 페인트로 공사 지점을 표시하고 갔기 때문이다. 발루트 시장 카멜 무사 씨(54)는 “불도저에 깔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이다”라며 흥분을 억누르지 못했다. 예정대로 공사가 진행되면 그는 자기 땅을 고스란히 잃게 된다. 그는 “(그들은 히틀러에게 당했다고 억울해 하지만) 샤론이야말로 작은 히틀러, 부시는 큰 히틀러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땅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인근 마을의 삶도 비참했다. 그들은 “장벽이 들어설 자리라며 전기를 끊어 버리고, 수시로 군인들이 집을 점거하는 통에 살 수가 없다”라고 호소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보안 장벽이 그대로 국경이 되리라는 것이다. 보안 장벽은 국제 사회가 합의한 국경, 이른바 그린 라인(1967년 설정)을 넘어서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깊숙이 파고들어와 건설되고 있다. 이미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정착촌 외에도 수백 개의 불법 정착촌이 팔레스타인 영토 안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주민 보호 명분으로 그 마을을 감싸안으며 보안 장벽을 쌓고 있다. 특히 공인 국경선인 그린 라인 유역의 정착촌은 비옥한 옥토로서 경제 가치도 높다. 이미 예루살렘 외곽과 라말라 등 두 지역은 1차 공사가 끝났고,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를 콘크리트 장벽으로 감싸는 2차 공사가 진행 중이다(위 지도 참조).

장벽에 갇힌 절망과 분노가 테러 불러

팔레스타인 영토를 갉아먹는 이스라엘 정착촌은 지난 수십년 동안 치밀하게 장려되었다. 특히 총리 직에 오르기 전 건설장관을 맡았던 강경파 샤론 총리는, 일찍이 정착촌 확대를 진두 지휘해온 인물이다. 치안을 보장하고 건설비를 지원하며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유태인 이주를 적극 지원한 것이다.

국제 여론을 의식한 샤론 총리는 정착촌을 철거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생색 내기에 불과하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공보관 파레드 씨는 “10 가구 남짓한 작은 정착촌을 언론 홍보용으로 철거할 뿐이다. 땅 따먹기 전략은 여전하다”라고 냉소했다.
안티 장벽 캠프에 참여한 이스라엘 청년 야네브도, 이스라엘 정부를 거세게 비판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보안 장벽에 동의한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장벽 때문에 땅을 잃고, 일자리를 잃고 있다. 테러는 이런 절망에서 나온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소수자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손을 쓰지 않고 있을까. 한 자치 정부 고위 관리는 아라파트가 무능하다는 데 동의했다. “아라파트 주변에 부패한 관리가 많다. 하지만 그들 덕에 통솔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부패상을 알고도 눈을 감는다. 아라파트는 테러를 지시하거나 막을 힘이 없는 상태이지만, 다른 지도자가 등장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실토했다. 그들은 사담 후세인에 대해서도 착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공보관 파레드 씨는 “후세인은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날린 첫 아랍 지도자이다. 물론 그것은 후세인의 상징 조작이다. 고작 미사일 40기로 이스라엘에 타격을 줄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인 체포 소식은 아랍인들에게는 지진과도 같은 충격을 주었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은 ‘바닷물을 주먹으로 막겠다’는 유태인들의 안간힘을 보여주는 전시장이다. 검색대를 통과한 짐은, 다시 육안 검사를 거치고, 경우에 따라 별도 조사실도 다녀와야 한다. 가방 속의 화장품은 하나하나 뚜껑을 열어 검색대에 비춰보고, 튜브 속 내용물은 손가락으로 눌러 보아야 검사가 끝난다.

지난 12월25일 크리스마스. 텔아비브 공항에서 기자가 4시간 동안 보안 검사를 받고 있던 바로 그 때, 텔아비브 시내에서는 석달 만에 다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4명이 숨졌다. 이스라엘은 헬기를 띄워 가자 지구를 폭격했고,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을 봉쇄했다. 악순환은 그렇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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