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방북에 숨은 미국의 新대북 구상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9.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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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북 수교보다 북·일 수교 우선 허용…기업의 북한 진출은 서둘러
무라야마 전 총리가 이끈 일본 방북단의 성공적 방북 이후 <시사저널>은 워싱턴·도쿄·서울의 취재망을 통해 이번 방북단에 `‘배후의 힘’으로 작용한 미국의 `‘신(新)대북 구상’ 윤곽을 추적했다. 워싱턴 정가에 공공연한 비밀처럼 떠도는 이 구상을 전해준 워싱턴 소식통은 “그동안이 (미국이) 심사숙고(con- sideration) 단계였다면, 지금은 가자(Let’s go)는 분위기이다”라고 말했다.

신대북 구상의 출발점은 ‘북·일 수교를 미·북한 수교보다 앞세운다’는 명제다. 과거 미·북한 수교와 북·일 수교 관계에 적용했던 ‘先美 後日’ 원칙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일본이 먼저 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며 적극성조차 띠고 있다.

북·일 수교를 앞세우는 대신 미·북한 관계는 당분간 점진적으로 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다. 일단 연락사무소 개설을 목표점으로 하면서, 외교 관계 위주로 진행되어온 기존 관계를 정치 관계로 확대하는 데 1차 목표를 두고 있다.

정치 관계라는 개념은 미·북한 관계에서 새롭게 등장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최근에 나타난 몇 가지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 얼마 전부터 미국을 방문한 북한 외교관, 그리고 뉴욕 주재 북한 유엔대표부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형철 유엔 주재 북한대사가 최근 들어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지사 및 상사, 그리고 재미 교포 경제인과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12월13일에는 미주실업인협회(회장 김봉섭) 주최로 열리는 북한투자설명회에 참석해 한국 지사·상사 대표 및 교포 경제인 50여명과 공개 접촉했다. 북한 외교관의 미국내 활동 범위가 확대되는 모습은 지난 9월 하순 백남순 외교부장 방미 때도 목격되었다. 그 역시 ‘`친북 성향을 갖지 않은 교포 기업인’ 10여명을 접촉했다.

미국, 북한 고위 인사 방미 추진

그동안 유엔 테두리 안의 공식 활동 이외에는 금지되었던 북한 외교관들의 움직임이 정치·경제 차원으로까지 활발히 확대되는 것은, 연락사무소 개설을 전제로 미국측이 이를 허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연락사무소 개설 문제는 페리 조정관 방북에 대한 답방으로 북한 고위 외교관이 미국을 방문할 때 마무리될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강석주 제1부부장이 올 것이 유력했으나, 최근 워싱턴 정가에서는 또 다른 얘기도 들린다. 북한이 그동안 대미 외교 전선에서 활동해온 강석주나 김계관 중 한 사람을 대일 외교 전선에 투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대미 관계 경험을 쌓은 인물을 대일 관계 외교 사령탑으로 삼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하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강석주가 적임자로 거론되는데, 이 경우 백남순 외교부장이 미국을 방문할 북한 고관이 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은 이처럼 북한과의 외교 관계 채널을 유지하면서 북한 노동당 고위 인사 방미를 병행해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김형우 전 유엔대표부 대사가 노동당 직속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데 이어,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 또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방미설도 퍼져 있다. 외교 라인과는 별도로 당 고위 인사들과 접촉해 미·북한 관계를 정치 관계로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미국은 왜 미·북한 관계의 속도는 당분간 조절하면서 북·일 수교를 앞세우려 할까. 속사정이 있다.

지난 9월12일 베를린 회담이 타결되었을 때 당시 협상을 주도했던 미국 행정부는 공화당을 주축으로 한 의회 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북한이 미사일 개발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단지 시험 발사를 중단한 것일 뿐인데 경제 제재 해제를 약속한 것은 과공(過恭)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행정부가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는 대가로 북한에 돈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미국 행정부는 당시 의회를 상대로 비공개 설명회를 열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고 한다. ‘북한 미사일을 해결하려고 미국이 돈을 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일본이 돈을 내게 될 텐데, 그러자면 일본에게 뭔가 선물을 주어야 한다. 그동안은 미국이 일본의 대북 수교를 가로막아 왔는데, 이제 이것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 이런 행정부의 설명을 정계가 수용했고, 이때부터 워싱턴 정가에는 북·일 수교가 미·북한 수교보다 먼저 이루어질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베를린 회담 때 일본으로 하여금 비용을 내게 하겠다는 얘기가 미·북한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은 회담 직후 칼럼니스트 짐 먼도 행정부 관리의 말을 인용해 지적한 바 있다. 그 구체적인 내막이 최근 <시사저널> 취재를 통해 일부 드러났다(66쪽 상자 기사 참조).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돈이 어떤 명분으로 지불될지는 앞으로 북·일 교섭 과정에서 조정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미사일 협상과 북·일 수교가 동전의 양면처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 실익 위해 두 가지 ‘비책’ 마련

사실 미국은 북한 문제에 비용을 부담할 여유가 별로 없어 보인다. 최근 몇년 사이 미국의 세계 전략은 `‘국제기구를 통한 세계 지배’였다. 아시아 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국제기구의 위력을 시험한 미국은 최근 비록 차질이 빚어지기는 했지만,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세계 무역을 장악함으로써 이를 확대하려는 데 외교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미국이 가용할 수 있는 비용 대부분이 세계무역기구 같은 국제기구 쪽에 집중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 들어갈 돈은 일본과 한국이 내라는 것이다.

이같은 현실적 이유로 일본이 먼저 북한과 수교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마냥 이를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일 수교 과정에서 발생할 경제적 실익이나 외교적 헤게모니 문제에 대처할 복안이 이미 서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Let’s go’라고 자신있게 얘기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복안 때문이다.

미국의 비책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가 미국 기업의 북한 진출이고, 또 하나는 ‘`미사일=현상 유지 전략’이다. 미국 기업의 북한 진출은 북한의 경제개발 계획을 선점하겠다는 데 그 본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회장이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박정희식 개발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도울 용의가 있다”라고 밝힌 것도 이와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60년대 박정희식 개발 때 국내에는 미국 자본이 주축이 된 국제금융공사(IFC)라는 기구가 있었다. 이 기구는 외국 자본이 국내에 들어올 때 기획 및 배분 기능을 담당했다. 만약 미국 유수의 금융회사 및 컨설팅 회사와 북한 정부가 `‘북한판 IFC’를 설립하게 되면 일본의 수교 배상금 또는 국제금융기관의 차관 등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권한을 이 기구가 쥘 수도 있다. 전체 이권을 장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미국이 차지할 경제적 이익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미국이 북·일 수교 협상을 허용하고, 북한의 당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에 불러들이는 것도 이와 관련해서 들여다볼 수 있다. 물론 미·북한 수교 일정 등에 대한 협의도 하겠지만, 정치적 결정권을 가진 당 고위급 인사들로부터 미국의 이권을 보장받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 기업의 북한 방문을 추진해온 제프리 존스 씨는 최근 방북을 희망하는 12개 기업을 확정하고, 내년 1월 중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사일 카드, 한국·일본의 대북 접근 속도 조절용

미국은 겉으로는 북한 미사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난 9월 베를린 회담에서 북한 협상단은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협상에 임했다. 이번에는 미국이 만만치 않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북한의 주장을 미국이 쉽게 수락한 것이다. 북측이 미국의 진의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사일이 북한의 카드인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에게도 유효한 카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유사시 한국이나 일본의 대북 접근 속도를 조절할 카드이다. 미사일 문제가 아직 살아 있어야 카드로서 유용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다시 돌이켜 보면 베를린 회담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일본이 왜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즉각 반박 성명을 냈는지 그 정황이 이해된다. 분담금까지 강요받고 있는 마당에 미국의 속셈을 간파하고는 감정이 상했을 것이다.

최근 일본측에서 ‘일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노동 미사일뿐이다. 이 문제만큼은 북·일 수교 협상에 포함해 직접 해결하겠다’는 얘기가 비공개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에 이미 단단히 쐐기를 박아 놓았다. ‘미사일은 미국이 해결한다. 일본은 이 문제에 끼어들지 말라.’

일본은 미국이 북·일 수교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언제 미사일 카드를 꺼내들어 뒤통수를 때릴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정면으로 받아치기에는 힘이 달린다. 아직까지는 미국의 도움 없이 혼자 북한의 군사 위협에 대처하기 힘들고, 북·일간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힘들다. 정면으로 받아치기는 힘들고 그대로 가자니 찜찜하고, 일본의 고민과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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