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보다 더 매서운 모스크바의 궁핍
  • 모스크바·이건욱(자유기고가) ()
  • 승인 1999.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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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러시아, 민심 흉흉… 체첸 사태 등으로 엎친 데 덮친 격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러시아에 대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길고 혹독한 겨울이라고 답하는 이가 꽤 많을 것이다.

열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기후대에 걸쳐 있는 큰 나라인데도 겨울이라는 이미지가 강렬한 것은 아마도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끝없는 설원과 거기에 잘 어울리는 배경 음악, 동장군에 퇴각당한 나폴레옹과 히틀러 이야기, 묵직한 주제의 러시아 문학 따위가 우리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러 기후대에 걸쳐 있다고 해도 확실히 러시아의 겨울은 춥다. 게다가 해가 짧아 밤이 무척 길며, 눈이 한국처럼 조용히(?)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함께 휘몰아치기 때문에 더 춥게 느껴진다.

그러면 이런 동화 나라 같은 모습을 연출하거나 때로는 나라를 구하기도 한 겨울을 러시아인은 어떻게 보낼까? 특히 올 겨울 러시아인은 국내외적으로 무척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다. 체첸과의 전쟁은 반군의 거센 반격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원유가가 상승해 막대한 돈이 들어오고는 있지만 전쟁 비용과 엄청난 나라 빚을 갚는 데 쓰느라 일반 국민의 삶은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나아진 것이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다가오는 총선과 Y2k 문제에 대한 준비가 부족해 러시아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손자가 러시아에서 살지 않기를 바란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러시아에서 겨울을 맞이한다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유쾌한 일이었다. 많은 전통 축제일이 있었고, 밤이 길다 보니 거기에 알맞는 놀이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일반 민중의 삶은 참담해져 갔고, 급기야 지난해에는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해 대다수 서민의 삶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회주의 시절 싼값으로 겨울밤을 낭만적으로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던 발레나 오페라 감상 따위는 이미 사치가 되어 버렸고, 사우나에 가서 보드카와 찬 맥주를 마시며 겨울을 나던 모습은 이제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낙이라면 텔레비전을 통해 옛 소련 시절 영화나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감상하는 정도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러시아의 겨울, 특히 수도인 모스크바의 겨울 날씨가 예전처럼 춥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구 온난화 현상에다가 대도시 오염까지 겹쳐 예전처럼 춥고 상쾌한 겨울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아무리 덜 춥다고는 해도 러시아의 겨울을 겪어본 사람들은 “역시 춥다”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 서민은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보다는 실내에서 겨울을 보내는데, 요즘은 총선을 앞두고 각 방송사가 즐거운 ‘정치 쇼’를 보여주어 무료한 겨울밤에 러시아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매주 일요일 저녁 국영 방송인 ORT에서 세르게이 다렌코라는 사회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ORT 방송사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신흥 재벌인 베레조프스키 소유이다. 소유주의 입맛과 크렘린의 정치적인 목적에 맞게 이 프로그램은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 시장,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 등 베레조프스키와 크렘린 계열의 정치인에게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공격한다. 일명 정보 킬러라고 불리는 사회자 다렌코는 막강한 정보력과 지적인 외모, 현란한 입담으로 일요일 저녁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물론 러시아인은 그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별로 믿지 않지만, 그가 쏟아내는 정치 스캔들은 긴긴 겨울밤의 지루함을 이겨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얼마 전에는 방송사 중 하나인 NTV에서 극우 민족주의자이며 정치인인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와 제1 부통령을 지낸 뒤 극우 연합당 수뇌로 있는 보리스 넴초프의 토론 프로를 방영했는데, 방송 끝 무렵 지리노프스키가 넴초프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는 엄청난 ‘쇼’가 벌어졌다.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이러한 일들이 공중파 방송에서 여과 없이 방영되는 것을 보고 시청자들은 한편으로 국가 장래를 걱정하면서도 은근히 이런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다.

필자는 이번 취재를 위해 많은 러시아인과 인터뷰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이번 겨울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는 질문에 무척 화를 냈다. 따뜻했던 예전과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현재의 삶이 비교되자 정치인에 대한 분노를 서슴없이 표현했다. 한 아주머니는 “이 저주받은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최소 백년이 걸릴 테니, 손자들은 제발 러시아에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몇 년째 찢어진 옷을 입고 있는데 새 옷을 살 돈이 없다고 울부짖었다. 한 대학 교수는 “비록 물질적 풍요는 기대할 수 없지만, 없으면 없을수록 인간적인 정으로 뭉치는 게 러시아인들의 삶의 특징이다. 다만 추운 겨울 전선에서 고생하는 젊은 병사들이 안쓰럽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이 극빈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일명 ‘노브이 루스키’라고 하는, 사회주의 붕괴 과정에서 약삭빠르게 많은 재산을 모은 이들은 이번 겨울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해외나 국내 유명 휴양지에서 보낼 참이다. 이들은 대부분 따뜻한 이탈리아·스페인·이집트 등에서 매일 수천 달러씩 뿌리며 졸부답게 인생을 즐기고 있다.
러시아 공산당, 최다 의석 차지할 듯

99년 겨울 러시아에서 가장 큰 일은 역시 12월19일에 있을 총선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한국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하원의원과 주지사, 시장을 뽑는다. 특히 이 중에서도 하원의원 선거가 가장 관심을 끌고 있다. 이는 이번 선거가 내년 6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의 전주곡이며,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내년 정권의 향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95년 총선에서는 사회주의로 회귀하느냐 아니면 자유 민주주의로 전진하느냐는 뚜렷한 이데올로기 주제가 있어서 총선 열기가 어느 정도 달아올랐으나, 금년 선거에는 특별한 이슈가 없고 기존 정치 세력에 대해 국민이 식상해 있기 때문에 투표율이 무척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 법무부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1백30개 정당 중에서 이번 선거에는 총 28개 정당 및 정당 연합이 참여한다. 젊은이들의 관심을 모았던 신 나치 극우 민족당인 스파스(구원)는 등록이 취소되었으며,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의 자유민주당도 마피아 등이 전국구 순번 상위에 배치되는 바람에 등록이 취소되어 ‘지리노프스키 연합’으로 간신히 선거에 참여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번 선거 역시 ‘러시아 공산당’이 제일 많은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 많고, 전통적으로 항상 조직 정비가 잘 되어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그 다음으로 의석 확보에 성공할 정당은 유리 루슈코프 모스크바 시장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전 총리가 이끄는 ‘조국-전 러시아당’이다. 대도시 밖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것이 흠이지만, 젊은층과 도시 중산층의 인기를 발판으로 선거에서 선전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았다. 그외 지방의 지식인 사이에 인기가 높은 그리고리 야블린스키가 이끄는 야블로코당도 전국구 후보 당선 한계인 전국 유효 득표율 5%를 넘어설 것으로 보이며, 젊은 전(前) 관료들로 이루어진 우파연합은 최근 체첸 사태 정치적 해결 요구, 벨로루시와의 통합 반대 등 국민들이 원하는 정책과는 정반대 의견을 내놓아 5%의 유효 득표율을 얻게 될지도 의문이다.
크렘린의 마지막 방패 ‘연합당’

하지만 러시아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여겨 보아야 하는 세력이 있는데, 세르게이 쇼이구 재해대책본부장이 이끄는 연합당(또는 ‘곰’)이다. 러시아에서 여당이라고 할 만한 당은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가 있는 ‘우리집-러시아당’인데, 국민들이 이들에 대해 너무나 식상해 있고, 게다가 체르노미르딘이 크렘린과 손잡기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이어서 크렘린측에서 대안으로 나온 이른바 ‘신당’이 바로 연합당이다.

이 당의 우두머리인 쇼이구는 특유의 처세술로 많은 지지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0%에서 시작한 그에 대한 지지도는 현재 프리마코프와 맞먹는 14∼16%대에 이르고 있다. 그가 몸 담고 있는 재해대책본부는 정부기관 중 자체 병력을 가진 몇 안되는 막강한 기관이며, 러시아 전역에 소방서를 비롯한 산하 기관을 거느리고 있다. 게다가 일반 민중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정부기관이라는 점, 대체로 소방관에 대한 일반인의 우호적인 태도, 이번 모스크바 및 도시 아파트 폭발 테러 때 보여주었던 신속한 구조 활동, 체첸 난민에 대한 재빠른 원조 등 러시아 국민에게는 다분히 ‘우리 편’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국가 기관이다.

이러한 점을 놓칠 리 없는 크렘린측은 연합당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체첸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푸틴 총리의 입지가 약해지면 언제든지 쇼이구를 총리로 내세울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서는 러시아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또한 옐친 이후 방패막이 필요한 크렘린과 신흥 재벌들은 쇼이구와 연합당 지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지난 11월 중순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국방부 참모장 회의에서 장군들에게 연합당을 지지해 달라고 촉구하는 국방장관의 친서가 낭독된 일이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쇼이구와 절친한 사이인 푸틴 총리는 공개 석상에서 연합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는 등 연합당의 선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러한 지원 덕인지 친 크렘린계 방송사들이 순위 조작을 했다 하더라도 연합당 지지도는 현재 10%선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렇게 정치인과 그 주변인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데 대한 일반 국민의 반응은 어떠한가? 취재에 협조한 한 러시아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놀고들 있네”이다. 필자가 조사한 러시아인 중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게다가 누가 되든 러시아의 현상황이 조금도 나아질 리는 없을 것이며, 당리당략에 온 정력이 집중될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한 나이 지긋한 여성은 누구를 찍을 것이냐는 질문에, 누가 되든 똑같지만 그래도 국민에게 알라 푸가초프(러시아의 유명한 국민 가수)처럼 즐거움을 주는 지리노프스키를 찍겠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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