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남성 총리 시대 ‘사요나라’?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2000.07.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여성 35명 의회 입성, 2명 입각…다나카 전 총리 딸 ‘대권 물망
일본 정계에 ‘여성 파워’가 거세지고 있다.
제2차 모리 내각에 여성 두 사람이 장관으로 입각했고, 6월25일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사상 최대인 35명이 금배지를 달았다. 일본 제2 도시 오사카(大阪)와 규슈의 구마모토(熊本) 현은 지사가 여성이다.여성 후보 2백2명 출마해 역대 최다 당선

제2차 모리 내각에 건설대신으로 입각한 오기 치가케(扇天景·67) 보수당 당수는 유명한 여성 가극단 다카라쓰카(寶塚) 배우 출신인데, 영화배우와 텔레비전 사회자로 명성을 날리다가 1977년 참의원으로 변신했다. 자민당이 그의 전국적인 인기를 고려해 참의원 전국구에 공천한 것이다. 6년 전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를 따라 자민당을 떠난 후 신생당·신진당·자유당을 전전하다가 지난 4월에는 오자와와도 결별하고 보수당을 창당해 당수로 선출되었다.

그녀가 참의원 의원에 네 번 당선한 경력으로 건설대신에 임명된 것은 미니 정당인 보수당을 이끌며 자민당과의 연립을 유지한 공헌도가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또 전임 건설대신이 정치자금 스캔들로 구속됨에 따라 자민당이 건설대신 자리를 포기한 덕분에 얻은 행운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건설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이 전혀 없는 그녀가 건설대신 직을 무사히 수행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런 우려에 대해 오기 대신은 “대신이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항변하면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을 시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받아넘겼다.반면 환경청 장관에 임명된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59) 씨는 전문성을 인정받아 입각했다. 가와구치 장관은 통산성 여성 관료의 효시로서 통산성 국제기업과장·경제협력부장과 주미공사를 지내다 7년 전 산토리 사에 첫 여성 임원으로 스카우트되어 상무로 활약했다.

이번에 그녀가 환경청 장관으로 발탁된 것은 모리 총리가 통산대신 시절 그 밑에서 지구환경문제담당 심의관을 지낸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또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 경제기획청 장관에 이어 민간인 출신 장관을 늘린다는 조각 방침에 따라 민간인으로서 장관에 발탁되었다. 주변에서는 환경 문제에 일가견을 갖고 있는 그녀가 환경청 장관 직을 원만히 수행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신과 장관을 보좌하는 총괄 정무차관에도 홍일점으로 하시모토 세이코(橋本聖子·35) 참의원 의원이 임명되었다. 홋카이도 개발 담당 총괄정무차관에 임명된 하시모토 의원은 본래 일본을 대표하는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였다. 여름 올림픽에서는 자전거 경기에도 출전한 기록을 갖고 있다.

자민당 공천으로 참의원 전국구에 출마해 금배지를 단 그녀가 얼마 전 큰 화제를 모았던 것은 참의원 신분으로 출산 휴가를 처음 얻어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 의원은 참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요인 경호를 담당하고 있던 경찰관과 결혼해 첫 번째 화제를 뿌렸다. 결혼 상대가 자식을 3명이나 둔 상처한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시모토 의원의 임신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일반 회사와 달리 참의원 규칙에는 출산 휴가 규정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출산 휴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로 논전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참의원은 공무보다 출산을 우선해야 한다는 여론의 압력에 눌려 참의원 규칙을 개정해 출산 휴가를 명문화했다.

하시모토 의원은 출산후 1주일 만에 출산 휴가를 반납하고 공무에 복귀했다. 그녀는 공무와 육아를 동시에 수행해 모범을 보이겠다며 의원 관사에서 아이를 기르면서 국회에 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6월25일 치러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여성 후보가 사상 최다인 2백2명이 출마해 역시 사상 최다인 35명이 당선했다. 8년 전 총선거에서는 14명, 4년 전 총선거에서는 23명이 당선했으니 총선 때마다 거의 두 배꼴로 여성 의원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그 중에서도 단연 화제를 모으고 있는 당선자는 최연소 당선을 기록한 사회민주당 하라 요코(原陽子·25) 의원이다. 그녀는 비록 소선거구에서는 낙선했지만 남 간토 지역의 비례대표구에서 부활해 당당히 금배지를 달았다.

그녀는 올해 25세로 막 피선거권이 부여된 나이이다. 지난 2월 25회 생일을 맞이한 그녀에게 사회민주당의 도이 다카코 당수가 출마를 권유해 본인은 ‘취직 활동의 하나’로 생각하고 출마 요청을 수락했다고 한다.

그녀의 선거운동은 20대 여성답게 매우 참신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녀는 젊은 자원봉사자들에게 선거 전단 만들기에서부터 선거 응원까지 모든 선거운동을 맡겨 돈이 들지 않는 선거를 치렀다. 같은 세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거 기간에 전자 우편과 인터넷도 활용했다.

하라 의원은 7월 초 국회에 처음 등원하면서 “오늘은 전차로 출근했으며, 국회에 오는 것은 수학여행 이래 처음이다”라고 보도진에게 말했다. 그녀는 또 국정 운영에 젊은 세대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도치기 1구에서 자민당의 거물 의원과 대결해 승리한 민주당의 미스지마 히로코(水島廣子·31) 의원도 큰 화제이다. 그녀는 본래 정치와는 거리가 먼 정신과 의사였다. 민주당이 지난해에 참신한 후보자를 공개 모집하자 이에 응모해서 전혀 연고가 없는 도치기 1구에서 출마했다.

도치기 1구는 자민당 후나다 하지메(船田初) 씨의 아성이나 다름없는 선거구이다. 중의원 의장을 지낸 그의 조부 때부터 후나다 일가가 의원 직을 독식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 연고가 전혀 없는 미스지마가 당선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후나다가 본처를 버리고 자민당 참의원인 하다 의원과 재혼함에 따라 지역구 분위기가 싹 돌아섰다. 특히 여성 유권자가 조강지처를 버린 후나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정치 신인인 미스지마에게 몰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미스지마 의원은 국회에 처음 등원하는 날 “여의사가 하는 일과 국회의원이 하는 일이 내용은 다를지 몰라도 목표는 다를 바 없다. 모든 사람이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갈 사회를 구현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여의사 출신다운 포부를 밝혔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총리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압도적 표차로 당선한 오부치 전 총리의 차녀 오부치 유코(小淵優子·26) 의원도 화제이다. 유코 의원은 개표가 시작된 후 한시간도 채 못되어 당선이 확정되자 “오늘이 작고한 부친의 생일인데, 이것을 부친에 대한 생일 선물로 생각한다”라며 울먹였다.

그러나 26세 나이에 간단히 금배지를 단 유코 의원에 대한 비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부친의 후광을 업고 당선한 이른바 ‘세습 의원’이기 때문이다.

선거구 물려받은 ‘세습 의원’ 자질 시비도

이번 총선거에서 당선한 세습 의원은 모두 1백10명에 이른다. 국회의원 5명 중 1명이 지역구를 부친이나 친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셈이다. 유코 의원도 부친인 오부치 전 총리가 급서하자 지역구 선거민의 열렬한 출마 요청을 받아들여 전격적으로 군마 5구에서 입후보했다.

그러나 유코 의원은 부친의 비서를 잠깐 했다고는 하지만 정치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그런 그녀가 부친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처음 입후보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자 능력과 자질 시비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지방 정계의 ‘여성 파워’ 진출도 눈부시다. 올 2월 치러진 오사카 부지사 선거에서는 통산성 관료 출신인 오타 후사에(太田房江·49) 씨가 압도적 표차로 당선했다. 이어 구마모토 현 지사 선거에서도 부지사 시오타니 요시코(潮谷義子·61) 씨가 상대 후보를 8만여 표 차로 누르고 당선했다.

일본 정계에서 여성 파워가 이런 추세로 늘어난다면 여성 총리가 탄생할 날도 멀지 않았다. <아사히 신분>의 총리감 여론조사에 따르면, 단연 선두 주자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딸인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56) 전 과학기술청 장관이다. <니혼게이자이 신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회민주당의 도이 다카코 당수도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