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은행은 죽어도 은행원은 산다?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1999.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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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현직 은행장 12명 고액 납세자 올라 ‘눈총’
일본의 고액 납세자 명단이 최근 밝혀졌다. 1위는 레이크 사의 전 회장. 연 6억9천7백만 엔을 벌었다.

올해의 특징은 장기 불황 여파로 천만 엔 이상 세금을 납부한 사람이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거품 경제가 극성을 떨던 때만 해도 천만 엔 이상 납세자가 매년 15만명을 넘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그 절반 수준인 8만4천명으로 줄어 불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말해 주고 있다. 거품 경제의 상징이던 토지·주식 부자도 크게 줄었다. 땅부자는 상위 백명 중 13명으에 불과했다. 주식 부자도 20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서민에게 급전을 빌려주는 소비자금융업자가 지난해에 이어 10명이 순위에 올랐다. ‘금융 빅뱅’의 영향으로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는 외국인도 3명이나 고액 납세자 명단에 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인터넷 관련 주식이 급등해 화제를 모았던 재일 동포 실업가 손정의씨의 이름이 고액 납세자 백명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은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갑부 148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작년에 납부한 세금은 7천5백만 엔. 3천80억 엔 재산가치고는 적은 금액이다. 소프트 뱅크측은 손사장의 납세액이 적은 것은 그의 재산이 모두 주식이고, 배당 수입과 임원 급여가 수입의 전부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부실 대명사인 은행에서 고액 연봉이라니”

은행장들의 수입이 엄청나다는 것이 드러난 것도 흥미롭다. 고액 납세자 명단에 따르면, 천만 엔 넘게 세금을 납부한 현직 은행장은 12명에 달했다. 이 중 1위는 2천15만 엔을 세금으로 낸 산와(參和) 은행장. 연간 추정 소득이 약 5천7백만 엔에 달했다. 산와 은행 외에도 은행장의 연간 추정 소득이 5천만 엔을 넘는 은행은 도카이(東海)·다이와(大和)·스미토모(住友)·후지(富士) 등 5개에 달했다.

세인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현직 은행장보다 은행장을 거친 고문과 상담역의 수입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산와 은행의 상담역과 도카이 은행 명예회장의 연수입은 8천5백만 엔 정도로 추정된다.

이같이 은퇴한 전직 은행장들의 연수입이 현직 은행장들보다 더 많은 것은, 고문·상담역 외에도 계열 회사 임원 직을 여럿 겸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은행장을 거친 고문·상담역은 고정 보수 이외에 덤으로 받는 수익이 엄청나다. 예컨대 운전기사가 딸린 전용차, 비서, 사무실, 유명 골프장 회원권, 접대비 등등. 이런 특권을 모두 합치면 딸린 수익만 연간 1억 엔에 달하리라는 얘기이다.

현직 은행장과 전직 은행장들이 이렇게 엄청난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 처리를 추진하고 있는 야나기 사와 금융재생위원장이 즉각 따지고 들었다. 그는 은행 경영자들이 높은 보수에 걸맞게 일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면서 “보수를 즉각 낮추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세금을 투입해 금융기관의 구조 조정을 열심히 추진하고 있는 터에 은행 경영자들이 턱없이 높은 보수를 받고 있다면 일반 납세자들이 납득할 수 있겠는가”라고 힐난했다.

여론도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이다. 최근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남자 실업률은 마침내 5% 선을 넘어섰다. 과잉 인력을 축소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은 앞으로 더욱 과격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되면 실업률은 자꾸 높아지게 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금융기관들이 국유화 조처와 공적 자금(세금) 투입 등을 통해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어 물의를 빚는 것이다.

예컨대 경영이 파탄한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은 국유화 조처로 도산하게 되는 상황을 면했고, 막대한 부실 채권을 안고 있는 은행들은 지난 3월 공적 자금 약 7조 엔을 받아 경영이 더 부실해지는 상황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지금 국민이 낸 세금으로 연명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마당에 은행장들이 턱없이 많은 보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여론이 들끓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은 은행 경영자들만이 아니다. <슈칸 겐다이(週刊現代)> 최근호에 따르면, 일반 은행원들의 보수도 제조업계에 비해 30% 이상 많게 책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보수가 많은 곳은 도쿄미쓰비시(東京三菱) 은행이다. 이 은행은 지난 3월 공적 자금을 한푼도 신청하지 않았을 정도로 18개 대은행 중 경영이 가장 건실하다. 이 은행 30대 행원의 평균 연수입은 8백50만 엔, 40대는 1천3백50만 엔, 50대는 2천만 엔에 이른다고 한다. 연봉2천만 엔이라면 웬만한 기업의 임원이 받는 보수이다.평균 연봉, 제조업체보다 30% 많아

18개 대은행 중 하위급 은행은 약간 처진다. 30대가 6백50만∼7백50만 엔, 40대가 1천1백만 엔, 50대가 1천5백만∼1천6백만 엔이다.

물론 경영이 파탄하여 국유화한 일본장기신용은행의 경우에는 보수가 대폭 삭감되었다. 30대가 6백만 엔, 40대가 7백만∼7백50만 엔, 50대가 9백 만∼9백50만 엔이다.

그러나 과잉 채무·과잉 고용·과잉 설비 투자라는 이른바 ‘과잉 3형제’로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제조업계에 비하면 금융기관 종사자들은 아직도 보수나 근무 조건에서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일본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본의 은행들은 왜 그렇게 빨리 문을 닫는가 하는 의문을 한번쯤은 품었을 것이다. 일본 은행들의 근무 시간은 일반적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다.

그러나 은행의 셔터가 내려지는 것은 오후 3시. 여름철에 3시라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각이다. 그런데도 은행들은 컴퓨터가 도입되기 이전의 관행인 ‘오후 3시 폐점’을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

은행들의 이같은 영업 관행은 일반 서민이나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처지에서 보면 분통이 터질 일이다. 열심히 일해도 보수가 깎이는 판에 은행원들은 놀고 먹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경영이 파탄하여 국유화한 일본장기신용은행이나 일본채권신용은행 행원들이 여전히 보너스를 받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물론 일본에서 보너스란 업적에 따라 지급되는 성과급이 아니라 기본 생활급에 가깝다. 그러나 도산 지경에 이른 은행을 세금으로 구제했으면 되었지 웬 보너스냐는 것이 일반 서민의 정서이다.

물론 일본의 금융기관들이 구조 조정 노력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개 대은행들은 지난 3월 공적 자금을 신청하기 전 각각 ‘경영 건전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주요 은행들은 오는 2003년까지 인건비 총액을 20∼30% 삭감할 방침이다.

앞서의 도쿄미쓰비시 은행은 이미 3년 전부터 임금을 동결했다. 지난 겨울에는 보너스를 평균 12% 삭감했다. 18개 대은행들을 평균하면 지난 겨울 보너스 삭감률은 30%에 달한다.

이에 따라 ‘화이트 칼라’의 대명사로 불렸던 은행원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 한 중견 은행원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연봉 8백만 엔일 때 은행 융자를 받아 내집을 마련했으나 보너스가 크게 깎이는 바람에 주택융자금을 상환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중견 은행원은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진학해 교육비 지출이 급격히 늘어나 온 가족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라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은행원들의 이같은 하소연에 동정하는 소리는 적은 것 같다. 주오(中央) 대학 오쿠무라 히로시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분명히 보너스를 삭감하는 은행은 많다. 그러나 고액 보수 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자세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라며 금융기관들의 구조 조정 노력이 아직도 크게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은행 하면 ‘보수가 높고 안정된 직장’으로 통해 왔다. 이제 와서 보수가 높기 때문에 은행이라는 직장이 불안정한 직장이 되고 있다는 것은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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