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옐친 이후 루시코프 뜬다?
  • 윤찬혁(대우경제연구소 모스크바 주재 연구원) ()
  • 승인 1999.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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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시장, 러시아 대선 앞두고 유리한 고지 점령… 옐친 탄핵 정국 최대 수혜자
옐친 대통령이 5월21일 예정에 없던 휴가를 갑자기 떠났다. 건강 상태가 심각할 때나 심각한 병에서 회복할 때 종종 이용해온 남부 해안 휴양 도시 소치로 떠난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공산당의 탄핵 시도를 한판 승부로 제압한 직후이다. 1주일 전 탄핵 투표를 하루 앞두고 공산당과 벼랑 끝 승부를 벌이던 긴장감은 이미 어제 이야기다. 옐친은 탄핵 저지를 위한 승부수로 프리마코프 총리 해임 카드를 써서 탄핵과 골칫거리 총리를 제거하는 일거 양득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원의 탄핵 시도로 악화한 최근의 정국 불안은 러시아가 처한 상황을 반영한다. 올 12월 총선과 내년 6월 대선은 옐친 이후의 정치 판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주요 정치 세력은 사안 별로 대결과 제휴를 반복하고 있다. 정국의 핵심에 있는 정치 세력은 크게 네 집단. 옐친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세력, 공산당, 루시코프 모스크바 시장, 프리마코프 전 총리다.

외환 위기 이후 탄핵 정국에 이르기까지 옐친은 우군 없이 수세에 있었다. 특히 그는 탄핵 논의 와중에 권력 심장부를 겨누는 스쿠라토프 검찰총장을 해임하려고 하다가 상원에서 두 번씩이나 거부되는 굴욕을 겪었다. 옐친이 최근 정국 혼란을 마무리한 이후 승리에 도취되어 휴가를 만끽할 만도 하다.

그럼에도 옐친의 휴가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최근 그의 건강 이상설이 크렘린 주변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심지어 옐친은 하원에서 탄핵 투표가 진행되는 시각에 정기 검진이라는 명목으로 병원을 찾았다. 이틀 뒤에는 스페인 총리 면담을 취소해 건강 이상설이 증폭되었다. 따라서 갑작스런 휴가는 정가의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탄핵 정국의 표면적 승리자는 옐친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국 전개 상황을 살펴보면 단기적으로는 개혁파와 루시코프가 커다란 이익을 챙긴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 주가노프 당수는 유리한 정치 국면에서도 탄핵에 실패함으로써 대선 후보 선정이나 당 운영과 관련한 당내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조국당’의 루시코프는 중기 대선 가도에서 많은 것을 얻은 듯하다. 그는 프리마코프와 지지 기반이 겹치는 대통령 후보이다. 따라서 루시코프 진영은 최근 정국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려 한다. 가깝게는 12월 실시되는 총선 전략으로 프리마코프를 총선 후보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프리마코프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를 조국당으로 흡수하기 위한 전략이다. 단기적인 성과도 나타났다. 프리마코프 총리 해임 이후 실시된 대선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루시코프가 프리마코프를 제쳤다. 탄핵 정국에서 프리마코프가 낙마하면서 루시코프 시장이 얻은 과실이다.

개혁파 진영 또한 상당한 전과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탄핵 정국에서 개혁파는 그동안의 분열된 양상을 극복하고 일시적으로 단결해 프리마코프를 퇴진시키도록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파 중 돋보이는 인물은 이번에도 베레조프스키다. 그는 프리마코프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면서 CIS 사무총장직 해임, 주요 기업 지분 상실, 검찰 조사로 이어지는 몰락 과정을 겪어 왔다. 정·재계의 막후 실력자가 몰락하는 듯했다. 그러나 스테파신 내각이 출범하면서 제1 부총리 악시오넨코를 비롯한 측근 인사 일부를 내각에 포진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자신이 반대하던 인사의 입각을 저지하는 성과도 거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베레조프스키 외에 추바이스를 비롯한 일부 개혁파도 옐친 이후 시대로 이행하는 길목에서 자기들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한 막후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일단 공동의 적이던 프리마코프 일파가 제거된 상황에서 자기들의 지분 확대가 최대 관심사이다. 이로 인해 스테파신 내각도 조각이 지연되고, 그 와중에서 자도르노프 제1 부총리가 취임한 지 사흘 만에 사임했다.

옐친 대통령의 탄핵 정국 이후에 2000년 대선 구도가 새로 형성되고 있다. 물론 뚜렷한 변화는 기정 사실화하는 프리마코프 탈락이다. 물론 프리마코프는 수 차례 대선 출마 의사가 없다고 밝혔으나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 때문에 출마 가능성이 높았다. 지난 8월 외환 위기 이후 여러 여론조사에서 프리마코프는 최종 결선 투표에서 어느 후보와 싸워도 승리할 것으로 조사된 유일한 후보였다. 그러나 총리에서 해임된 이후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는 특정한 정치 조직이나 기반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가 자기 힘으로 정치적 재기나 세력을 형성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유사한 세력과 제휴하면 기회가 올 수도 있다. 루시코프의 조국당과 공산당이 대상이나, 이들의 대선 후보가 될 가능성은 적다.스테파신 신임 총리, 대선 전선 합류

이런 점에서 루시코프가 대선 구도에서 가장 유리하다. 지방 정부 지도자들도 합종 연횡하는 사이에 루시코프와 프리마코프를 왔다갔다 했으나 힘의 중심이 루시코프 쪽으로 쏠린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92년 러시아 급진 개혁을 초기에 착수했고, 개혁파 정당인 ‘러시아의 선택’당을 이끌고 있는 가이다르 전 총리는 가장 유망한 대선 후보로 루시코프를 지목했다.

새로 떠오르는 인물은 없는가? 과도기의 총리 자리가 갖는 특성 때문에 스테파신 신임 총리가 이미 대선 후보군에 합류한 것으로 보는 정치 관측통이 있다. 특히 스테파신 총리는 옐친에게 변함 없이 충성을 보여 왔다는 점 때문에 옐친이 후계자로 지명할 가능성도 있다. 셀레즈노프 하원의장이 출마할 가능성 역시 끊임없이 제기된다. 탄핵 실패 이후 주가노프의 지도력이 도전받을 수도 있음을 고려하면 이전보다 상황이 좋아졌다. 모든 정파를 아우르는 지도력과 지방 정부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점을 고려하면 스트로예프 상원의장이 출마할 여지도 있다.

이러한 전망은 옐친의 정치적 행보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옐친의 정치적 행보는 그의 건강 상태가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최근 그의 건강 악화는 정국 불안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더구나 2000년 러시아와 벨로루시와의 통합 시도는 옐친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정국 불투명성은 더욱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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