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 “중국 WTO 가입” 앞에 자중지란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2000.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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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민주당 ‘반대’에 전전긍긍… 공화당이 오히려 ‘구세주’
지난해 성 추문과 관련해 연방 의회의 탄핵 심판으로 생애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처했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그가 요즘 이에 버금가는 고민거리로 수심이 가득하다. 그 고민거리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관련한 의회와의 힘겨운 투쟁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무려 13년간 협상한 끝에 중국과 세계무역기구 가입 협상을 타결해 쾌재를 불렀다. 그는 이를 실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에 ‘항구적인 정상 교역국 대우’(PNTR)를 부여하는 법안을 지난 4월 초 하원에 제출했다. 그런데 5월22일 표결을 앞두고 자신이 속한 민주당 의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과반수 선인 2백18표를 얻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이처럼 표결 날짜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법안이 하원을 통과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백악관은 물론 상무부 등 관련 부처에 비상이 걸렸다.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일정을 대폭 줄여 가면서까지 매일 전화통을 붙들고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다. 또 최선봉에서 의회에 행정부 차원의 로비를 벌이고 있는 윌리엄 데일리 상무장관도, 하원이 관련 법안을 부결할 경우 앞으로 거대한 중국 시장을 유럽이나 일본 기업들에 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열심히 설득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미국 중앙 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과 콜린 파월 전 합참의장이 의회에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했고, 제럴드 포드·지미 카터·조지 부시 등 전직 대통령도 공개 서한을 보내 ‘의회가 관련 법안을 부결한다면 중국과 대결을 바라는 투표로 인식될 것’이라며 법안 가결을 호소했다.

노조 “동조하면 낙선운동 한다”… 민주당 위협

그러나 백악관의 전방위 로비와 각계의 끈질긴 호소에도 불구하고 현재 표결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공화당의 경우 최고 1백50명이 찬성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정작 클린턴이 속한 민주당의 대다수 의원이 반대표를 던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년간 중국에 대한 교역상의 최혜국대우(MFN) 갱신 투표와 관련해,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의원은 1백50명이었고 민주당 의원도 1백10명에 달해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최혜국대우가 아닌 항구적인 정상교역국 대우 지위를 부여한다는 데는 민주당 찬성 의원이 고작 50∼60명 선이다.그렇다면 민주당 의원 대다수가 찬성표를 던지는 데 부정적인 까닭은 무엇일까. 원인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자금줄이자 지원 세력인 전국의 각종 노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 문제가 타결된 이후 미국내 최대 노조 세력인 전미산별노조총연맹(AFL- CIO)의 존 스위니 회장은 전국 규모로 조직적인 반대 운동을 줄기차게 벌이고 있다. 특히 총연맹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 관련 법안에 동조하는 민주당 의원들에 대해서는 오는 11월 중간 선거 때 낙선운동을 펼치겠다고 공언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대규모 시위를 지난 3월 의사당 앞에서 벌였다.

이들이 내세우는 반대 이유는 중국의 인권 상황과 열악한 노동 환경이다. 즉 중국 정부가 이를 개선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고 금상첨화로 미국으로부터 정상교역국 대우 지위를 얻게 될 경우 예상되는 부정적 충격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으로 값싼 중국제 물건이 미국 시장에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물론, 미국 기업들이 생산 기지를 미국 본토에서 중국으로 옮길 경우 그 피해를 고스란히 해당 분야 노동자가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노조의 거센 반대 입김은 민주당 의원들에게 실제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이 때문에 고무 공장과 타이어 공장이 밀집한 오하이오 주 출신 토머스 소여 의원을 포함해 노조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대다수 민주당 의원이 반대 의사를 분명히했다. 특히 민주당의 사령탑 격인 리처드 게파트 원내총무마저 노조를 의식해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공개 선언했을 정도이다. 그는 의회가 중국에 항구적인 정상교역국 대우를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경우 앞으로 중국의 인권 문제 등을 견제할 수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설상가상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앨 고어 부통령은 이 문제에 관해 클린턴 대통령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자신이 집권하면 중국과 다시 협상하겠다고 나섰다.

현재 클린턴 행정부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민주당 의원 70여 명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일환으로 최근에는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과 그에 따른 시장 개방 계획을 담은 2백50쪽짜리 비밀 문건을 의회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미국내 최대의 수혜자는 농산물 종사 업체다. 중국은 앞으로 미국산 밀에서부터 수확 기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제품에 대한 관세 장벽을 없애야 한다. 또 중국 당국은 해마다 미국 영화 20편이 중국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며, 이동전화 서비스 분야의 경우 미국 통신업체들이 최고 49% 지분을 보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뿐이 아니다. 중국은 2004년까지 초콜릿 과자 제품에 대한 관세를 25%로 내려야 하며, 미국 보험회사들이 늦어도 2002년 안에 다롄 지역에서 보험 상품을 팔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게다가 중국 정부는 국내에서 자본주의의 상징 격인 리스 업무(금융 대출)를 허용하는 시점과 때맞추어 미국 리스업체들에도 똑같은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클린턴 행정부는 이 조항이 모두 실천에 옮겨질 경우 가장 득을 보는 쪽은 중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미국 업체들과 노동자라는 점을 극구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노조의 정치적 입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민주당 의원들은 꿈쩍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자 최근에는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안보 논리’를 개발해 의원 설득에 나섰다. 그는 만일 의회가 이번에 관련 법안을 부결할 경우, 중국은 이를 중국을 봉쇄하기 위한 대결 차원에서 바라보려 할 것이며, 그 경우 미·중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아닌 적대 관계로 돌아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주룽지 총리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의 처사에 불만을 품어온 강경파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그는 경고했다. 이렇게 되면 중국의 강경 지도부는 타이완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보다 더욱 강경한 행동을 취할 수 있으며, 이에 미국이 대응하려 할 경우 미·중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버거 보좌관의 이런 안보 논리가 얼마나 먹힐지 두고보아야겠지만, 민주당 소속 스테니 호이어·로이스 캡스 의원은 찬성 쪽으로 돌아섰다.

공화당의 아이러니, ‘클린턴 구하기’

사태가 점점 꼬여 가자 지난 5월4일에는 민주당 샌더 레빈 의원이 궁여지책으로 자당 의원들을 겨냥해 절충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 안의 핵심은 노조가 문제 삼고 있는 중국의 열악한 인권 상황과 노동 기준을 검토하고 의회와 백악관에 조언하는 기능을 갖는 9인 특별위원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무역법안 반대자들은 실질적 권한이 없는 이런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발상에 대해 부정적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겉으로 내놓고 반색은 못해도 내심 흡족해 하는 분위기이다. 이 안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민주당 의원 가운데 최소한 15명 정도는 찬성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법안이 부결될까 봐 몸이 달아 있기는 전통적으로 업계의 이익을 대변해온 공화당도 마찬가지다. 이미 공화당 의원 약 1백50명이 찬성 표결에 돌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공화당 지도부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한 텔레비전 연설을 촉구했다. 지난해 클린턴 대통령의 성 추문과 관련한 탄핵 심판 당시 제일선에서 공화당 의원들을 진두 지휘했던 톰 딜레이 의원이 클린턴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역효과를 우려하며 이런 공화당측 구상과 움직임에 부정적이다. 공교롭게도 현재 클린턴을 구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당은 반대 당인 공화당이고, 정작 클린턴이 속한 민주당은 강력한 노조의 반발을 의식해 ‘주군’에 등을 돌려버린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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