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서 유일한 주권 국가, 미국
  • 崔寧宰 기자 ()
  • 승인 1999.07.0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엔 무력화·국가 주권 무시, ‘워싱턴 잣대’로 무력 사용
유고전쟁 이후 국제 사회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던 국제 사회의 원칙과 규범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붕괴된 규범은 이런 것이다. △독립 국가 주권은 국제 사회가 보호해야 하는 신성 불가침 영역이다. △국제 분쟁이 일어나면 모든 나라가 회원으로 참여하는 유엔이라는 국제 기구를 통해서 해결한다. △유엔 헌장은 모든 국가의 법보다 우선하는 상위법이다. 이런 기본 원칙을 바꾸고 있는 장본인은 미국과 나토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이다.

먼저 주권 개념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보자. 지금까지 국제 사회는 독립 국가 주권을 해당 국가 국경 안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이해했다. 주권은 국경 바깥에서도 어떠한 권위에 종속되지 않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최근 주권 개념을 제한하고 위협하는 사례가 종종 등장하고 있다.

호주 모나시 대학 크리스 로이스 스미스 교수는 98년 전세계 1백20개가 넘는 나라가 서명한 로마협정을 그 대표적인 사례로 든다. 이 협정은 침략이나 반인도주의적인 대량 학살을 저지른 전범을 국경을 초월해서 체포해 국제 범죄 법정에 세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칠레 정부가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 피노체트를 체포해 재판하고 있다. 전통적인 주권 개념에서 보면 이는 분명히 칠레 주권을 침해한 것이다.

미국 국제법 학자들 ‘유엔 무용론’ 제기

스미스 교수는 주권이 영구 불변하는 개념이 아니라 가변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주권 개념이 역사적으로 세 가지 국면을 겪으며 변했다고 지적했다. 첫 번째 국면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시기인데, 시민 권리를 보호하고 이익을 높이는 데 국가 주권 개념이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국면은 1914년 이후이다. 이 때부터 주권 개념은 유럽에서 전제군주제를 뒤엎고 의회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국민 주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해 국제연맹과 유엔을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유엔이 주권 국가의 국내 문제에 국제 사회가 간섭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건 것은 이러한 주권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스미스 교수는 이제 이런 주권 개념이 퇴색하고 새로운 형태를 개발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이제까지 주권 개념을 떠받치던 것은 유엔이라는 기구였고, 유엔 헌장이었다. 유엔은 가능하면 독립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모든 결정을 내렸다. 물론 국제법상 유엔이 국내 문제에 완전히 개입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유엔 헌장 2조 7항은 ‘국내 상황이 국제 평화에 위협이 된다면 유엔이 국내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분명한 조건을 달았다. △국내 문제가 국제화할 가능성이 크고 △외세가 개입한 가능성이 높고 △대량 난민이 발생하고 △주변 국가의 안보에 위협이 될 때이다.

91년 유고사회주의연방이 무너질 때 유엔이 개입한 것은 이런 원칙을 따른 것이다. 유엔은 식민 전쟁(피지배 민족의 경우에는 민족해방전쟁)이 비록 국내전이지만 국제전이라고 규정하고 개입했다. 50년대에 벌어진 알제리 전쟁과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와 벌인 독립 전쟁이 대표적이다. 이 모든 개입은 유엔 안보리를 거쳐 결정되었다.

그런 유엔이 최근 무력해지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미국 때문이다. 미국은 80년대 이후 줄곧 유엔을 흔들고 있다. 또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법학자들은 ‘유엔 무용론’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마이클 J. 글레넌 교수는 <포린 어페어> 5/6월호에 실린 ‘새로운 개입’이라는 기고문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다.

글레넌 교수는 유엔 헌장을 초안한 이들이 침략 행위를 어떻게 금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려 독립 국가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 결과 유엔이 출범 이후 40여 년 동안 내전과 지역 불안정을 거의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하이티·소말리아·르완다 같은 곳의 분쟁에서 민간인이 대량 학살되었지만 국내 분쟁이라는 이유로 유엔이 무시해 적기에 개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글레넌 교수는 유엔이 국가가 주도하는 테러리즘에도 무력했다고 말했다. 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로 가는 팬암 여객기를 폭파한 리비아인 혐의자들을 리비아 정부가 내놓지 않는데도 유엔이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대사관이 폭탄 테러를 당했을 때도 유엔은 속수 무책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처럼 유엔 조직이 마비된 것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다섯 나라가 거부권을 남용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인지 현재 미국은 국제 문제에서 유엔을 동원하기 힘든 경우 집단적인 정당성을 보장하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구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나토이다. 유고전쟁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은 나토 같은 지역 안보 기구의 임무를 세계 경찰 같은 존재로 넓히고 있다. 또 유엔이 허락하지 않는데도 나토가 행동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냉전이 끝났기 때문에 이를 저지할 상대국은 없다. 경제난에 허덕이는 러시아는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중국도 아직은 국제 문제에 간섭할 만큼 물리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물론 이런 식으로 국제 사회 규범과 원칙이 재편되는 것을 마냥 나무랄 수만은 없다. 특정 국가의 주권을 일부 제한하더라도 인도주의를 보장할 수 있고, 무력을 사려 깊게 사용해서 독재자가 저지르는 인종 청소나 인권 유린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는 바람직한 일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무력을 사용하는 근거가 미국이 강조하는 정의와 인권이라는 데 있다. 이는 상당히 자의적으로 해석될 위험이 크다. 한 예로 미국은 세르비아계가 코소보에서 저지르는 인종 청소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나토 공습에 따른 유고 민간인 피해에는 침묵한다. 기자와 직접 인터넷으로 전자 우편을 주고받은 유고 민간인들은 나토의 폭격 때문에 코소보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유고 북쪽의 수많은 민간인과 어린이가 희생되었다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는 최근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은 인명과 인권에 대해서 명백히 ‘이중적 기준’을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인 희생자에 대해서는 극히 민감하지만, 미군이 해외 군사 작전을 벌일 때 생기는 다른 나라 국민의 희생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목숨도 국적에 따라 값이 다르다는 것이다.

유고전쟁이 그렇다. 미국과 나토가 인도주의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면 자국 군인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전쟁을 빨리 끝내게끔 작전을 펼쳤어야 했다. 또 서방이 인도주의라는 이름으로 유고에서 싸웠다면 이는 분명 실패한 전쟁이다. 밀로셰비치의 인종 청소는 유고 폭격 이후 더욱 거세졌다. 유고 민간인 피해를 줄이고 밀로셰비치를 제압하는 가장 빠른 길은 지상군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미군 희생자가 생길까 봐 이를 택하지 않았다.

미국 목에 누가 감히 방울을 달겠는가

미국과 나토가 주장하는 도덕적 정당성에도 문제가 있다. 조시현 교수(성신여대·국제법)는 “한 국가가 믿는 도덕성을 다른 국가에 일방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특정 국가와 문명권이 주장하는 도덕성은 주관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라고 지적했다. 조교수는 “국제 사회 입장에서는 미국과 서방이 주도한 유고전쟁이 이번 사례로 그치고 일반적인 선례로 굳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무너진 국제 규범이 너무 커서 뒷감당을 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이제 주권 개념을 신성 불가침으로 보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흐름이다. 지금까지 국제 사회가 합의해 온 하나의 독트린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문제는 이를 대신할 새로운 국제법 규범과, 합의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짓밟힌 유엔 헌장은 다시 복구할 길이 없다. 그래서 앞으로는 각국이 어깨를 다투어 군비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유엔 헌장이 무력해져 누구도 군비 축소를 외칠 명분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이 쿠바를 폭격해도,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도, 스페인이 지브롤터를 합병해도 국제법으로는 이를 단죄할 수 없다.

이를 응징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힘뿐이다. 실제로 미국은 전세계 모든 국가가 정의와 인권에 어긋나게 행동할 경우 언제든지 응징할 수 있다는 태세이다. 힘 없는 쥐들의 목에 방울을 달아놓은 격이다. 하지만 미국이 국제법을 어길 경우 어느 누구도 이를 탓할 힘이 없다. 고양이 목에 쥐들이 방울을 달 수 없는 것처럼.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