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로 제 무덤 판 모리 일본 총리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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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나라’ 실언에 매춘 경력까지 드러나…일본 언론들 “총리 자격 없다”
모리 요시로(森喜郞) 총리가 하마평대로 ‘준비된 총리’가 아님이 드러났다.

모리 총리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임 총리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오부치 정권에 멸사봉공해온 점을 인정받아 후임 총리로 전격 선임되었다. 일본의 정치 평론가들은 이때 모리 총리의 실언벽(失言癖)을 지적하면서 “전임 오부치 총리가 눌변(訥辯)으로 애를 먹었다면, 그는 실언으로 재임중 큰 애를 먹게 될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그런 예견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모리 총리의 실언은 취임 기자회견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4월5일에 열린 취임 기자회견 때 “오부치 전 총리와 나는 같은 쇼와(昭和) 12년 태생입니다. 지나(支那) 사변이 발발한 해에 태어난 거죠”라며 병석의 오부치 전 총리와 동갑내기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지나’는 중국 정부가 중국을 멸시하는 호칭이라며 싫어하는 단어이다. 모리 총리가 취임한 직후라는 점을 감안해 중국 정부가 이 발언을 문제 삼지 않았지만, 공식 석상에서 다시 지나라고 부르면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24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 발언도 문제였다. 그는 “전쟁에 대해서는 시대 배경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 의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침략 전쟁을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은 모두가 역사 속에서 판단할 문제이다”라고 자신의 우경 역사관을 자랑했다. 따지고 보면 이때의 발언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라는 발언의 첫번째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리 총리의 두 번째 예고편은 5월8일에 튀어나온 ‘교육 칙어 부활’ 발언이다. 그는 사쿠라이 전 중의원 의장의 후원회 총회에서 “교육 칙어에는 대단히 나쁜 부분도 있었지만, 대단히 좋은 부분도 있었다. 교육 칙어 정신의 일부를 부활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교육 칙어는 일본 제국주의 당시 교육의 기본 이념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황국사관에 근거한 교육 이념이라는 비판이 일자 일본 정부는 패전 직후 이를 사문화했다.

일본 언론이 모리 총리의 시대착오적인 ‘교육 칙어 부활’ 발언을 물고늘어지자 그는 기자단의 질문에 침묵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 와세다 대학 웅변회 출신임을 자랑해온 그가 언제까지나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1주일 뒤 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주도하고 있는 ‘일본 신도정치연맹’ 소속 국회의원 간담회에 출석해 끝내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라는 발언을 터뜨렸다. 앞서의 몇 가지 실언 소동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를 잡으면 거침없이 아무 말이고 튀어나오는 그의 실언벽이 또다시 꿈틀거린 것이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중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튀어나온 그의 결정적인 실언을 두 번 다시 없는 기회로 보고 모리 총리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민주당은 즉각 사임을 요구하고 있으며, 모리 총리가 사임을 거부할 경우 국회에 불신임안을 제출할 방침이다.

민주당 “모리 즉각 사임하라” 총공세

모리 총리의 문제는 실언만이 아니다. 월간 <우와사노 신소>(소문의 진상)가 보도한 추문은 모리 총리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우와사노 신소>에 따르면, 모리 총리는 와세다 대학 시절 매춘 행위를 한 혐의로 검거된 경력을 갖고 있다. 1958년 2월17일 경찰이 적선지대를 일제 적발했는데, 검거된 20여명 중에 당시 스무 살이던 모리 총리가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 주간지 <포커스> 보도에 따르면, 모리 총리는 예전부터 자신의 매춘 경력을 스스로 시사해 왔다고 한다. <포커스> 5월17일호는 모리 총리가 이전에 자신을 담당한 기자들 앞에서 늘어놓은 무용담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와세다 대학 시절 살고 있던 아파트에 야쿠자도 함께 들어 있었지. 그가 매춘부를 끌고 와서는 우리에게 멋대로 해도 좋다고 해 아파트 학생들이 윤간한 적이 있어. 나는 안했지만, 모두 임질에 걸렸지. 당신들은 임질이 어떤 병인지 알고나 있나?”

모리 총리의 추문은 이것만이 아니다. 모리 총리는 지난해 3월 출판한 자서전 <여러분에게 질책을 받아 달려가겠습니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전말과 <산케이 신분>에 입사한 경위를 자세히 기록했다.

이 책에 따르면, 모리 총리는 고등학교 시절 럭비에 열중해 공부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럭비부가 센 와세다 대학에 기를 쓰고 입학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에 묵은 적이 있었던 와세다 대학 럭비 감독에게 애원해 간신히 체육 특기자로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다.

모리 총리, 얼마나 버틸까

그러나 대학 시절 그는 럭비에도 공부에도 전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졸업을 앞두고 정계 진출을 꿈꾸며 언론사에 취직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필기 시험에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재계 인사에게 부탁해 겨우 <산케이 신분>에 입사했는데, 당시 답안지에는 이름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모리 총리의 잡다한 추문을 폭로한 <우와사노 신소>는 그를 ‘상어와 같은 뇌에 벼룩과 같은 심장을 갖고 있는 정치가’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그가 총리로서 실격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폭로 기사를 싣는다’고 밝혔다. 매스컴으로부터 실격 판정을 받은 모리 총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요즘 일본에서는 그것이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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