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보고서 핵심은 "평양에 마지막 기회 준다"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1999.03.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리 보고서’ 윤곽 드러나… 미국, 핵·미사일 문제 해결에 호응하면 ‘당근’, 거부하면 ‘채찍’
미국 윌리엄 페리 북한 정책 조정관의 발걸음이 바빠지고 있다. 연초 한국 등 우방을 방문해 자기가 주도하는 북한 정책을 재검토하는 작업을 협의했던 그가 3월8일 서울을 다시 찾았다. 이번 방문은 이미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진 재검토 보고서(페리 보고서) 내용과 관련해 이견을 조율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미 2월26일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북한 정책 재검토 작업에 관해 중간 보고를 했다.

지금까지 페리 보고서의 핵심은 두 가지로 압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른바 2단계 방안으로 전해진 페리 보고서의 골자는 ‘당근과 채찍’을 함께 구사하는 강온책이지만, ‘채찍’ 쪽에 더 무게가 실렸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우선 1단계로 한국 정부가 일관되게 요구해 온 일괄 타결식 해결 차원에서 북한에 핵과 미사일 개발 문제를 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며, 북한이 이에 호응하면 정치적·경제적 대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은 94년 제네바에서 합의한 대로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대폭 완화하는 동시에 대사급 관계를 수립할 조처를 확대해 간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완전한 성의’가 확인될 경우 미국은 김정일 체제 보장까지 담보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페리는 ‘북한 고립책’ 요구할 것인가

그러나 북한이 이같은 제의에 호응하지 않을 경우 미국은 2단계로 미·북한 관계를 최소한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을 펼친다는 것이다. 이 전략에는 식량 지원 중단은 물론이고 올해분 중유 지원을 중단하는 것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2단계 방안이다. 즉 북한에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주되, 북한이 호응하지 않을 때 과연 응징을 전제로 한 북한 고립책을 택하도록 미국 정부에 요구할 것이냐 하는 점이 페리의 고민인 것이다.

이번에 페리가 서울을 방문해 한국측과 중점 협의한 부분도 바로 이 대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악의 경우 북한이 미국의 고립 정책 또는 봉쇄 정책에 반발해 다시 핵무기 개발에 나서고, 미국 본토에 이를 수 있는 대포동 2호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경우 과연 미국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 응징에 나설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굳이 북한과 마찰을 자초함으로써 앞으로 2년도 채 남지 않은 임기 동안 북한 문제로 씨름하고 싶지 않은 것이 클린턴 대통령의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페리 보고서가 클린턴 행정부의 북한 정책에 100% 반영된다는 보장은 없다. 어차피 페리는 미국 의회의 초당적 지지를 등에 업고 한시적으로 활동하는 민간 인사인 데다, 그가 내놓을 보고서 역시 꼭 정책을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고 요구하기보다는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성격을 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된 까닭은 현재 미국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눈을 부릅뜨고 보고서의 최종 내용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벤저민 길먼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을 필두로 한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은 제네바 합의문 자체를 클린턴 외교팀의 실패작이라고 규정해 왔다. 이같은 분위기는 지난해 10월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가 올해분 중유 지원 자금 3천5백만 달러 집행을 조건부로 승인한 데서 잘 나타난다. 그 조건 가운데는, 1단계로 2월 말까지 북한이 문제가 된 일부 지하 시설에 대한 핵 의혹을 규명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또 2단계로 5월 말까지는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관련해 이를 중지시키기 위한 미·북한 협상에 진전이 있어야 한다.

현재 북한을 바라보는 미국내 보수 진영의 시각은 지난해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금창리 지하 시설 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보수파의 대북 인식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보수 진영을 대변하는 <월 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3월2일자 사설을 통해 한국 정부의 햇볕 정책과 클린턴 정부의 포용 정책, 나아가 아직 발표하지도 않은 페리 보고서의 가치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특히 관심을 끈 것이 지난 2월26일 발표된 ‘아미티지 보고서’였다. 과거 공화당 정부에서 국방차관보를 지낸 리처드 아미티지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 인사 11명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힘의 우위를 통해 북한 문제를 해결하라고 강조해 눈길을 끈다. 이 보고서는, 기본적으로 북한에 대해 핵과 미사일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포괄적인 협상책을 제시하되, 이를 북한이 거부할 경우 북한내 특정 목표에 대한 선제 공격도 불사한다는 강경책을 담고 있다.

아미티지를 포함해 폴 월포위츠 존스 홉킨스 국제대학원 원장과 로버트 리스카시 전 주한미군 사령관, 피터 브룩스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전문위원 등 보수파 인사가 내놓은 이 강경책은 국방부와 공화당 견해를 반영하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80년대 후반 부시 정부에서 국방차관보를 지낸 월포위츠는 현재 공화당 차기 대선 주자로 떠오른 조지 부시 2세(텍사스 주지사)의 외교 자문역을 맡고 있어, 차기 정권이 공화당으로 넘어갈 경우 이같은 강경책이 채택될 가능성이 커졌다. ‘전쟁 불사’할 강경책은 제시하지 않을 듯

페리 조정관은 워싱턴 정계의 대북 강경론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정부의 햇볕 정책이나 클린턴 행정부의 포용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공화당이 주도하는 의회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가 불가피하게 ‘북한의 호응이 없으면 강경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적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이 나오는 것은 94년 봄 이른바 ‘한반도 위기설’을 직접 체험한 페리 개인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북한의 플루토늄 재처리 시도 문제로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을 당시 국방장관이던 그는 미국 공군이 마련해온 대북 공격 가상 시나리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시나리오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터지면, 90일 안에 미군 5만2천명과 한국군 49만명이 죽거나 다치고, 이 기간에 치러야 할 전쟁 비용은 6백10억 달러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시나리오는 박격포 8천4백문과 다연장 로켓포 2천4백문을 포함해 전군의 65%를 휴전선 근방에 배치한 북한이 전쟁 개시 12시간 안에 박격포를 5천발 발사해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라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자신의 저서 <두 개의 한국>을 집필하기 위해 페리 조정관을 면담했던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 돈 오버도퍼 교수는 최근 기자에게 “이런 충격적인 내용을 접한 페리 조정관은 이같은 시나리오를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게 그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페리 보고서에 전쟁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강경책이 담길 것이라고 보는 한반도 전문가는 별로 없다.

한국은 북한을 군사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표현이나 문구를 될수록 사용하지 말기를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군사적 강경 대응이 들어 있는 2단계 부분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미국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대체로 페리 보고서의 최종 방향을 현재 뉴욕에서 진행 중인 미·북한 회담 추이와 관련지어 파악하려 하고 있다. 즉, 북한 금창리 사찰 문제에 관해 극적인 합의가 나와 미·북한 관계의 앞날에 청신호가 켜질 경우, 페리 보고서가 담게 될 강경 대응안도 그만큼 희석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전망이다.

어쨌든 페리 보고서와 미·북한 협상이 진전할지 여부의 함수 관계 때문에 미국 국무부도 전전 긍긍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의 뉴욕 회담에서 찰스 카트먼 미국 대표는 북한의 김계관 대표에게 늦어도 페리 보고서가 나오기 전인 3월 안에는 사찰 문제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매우 강하게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북한이 이런 미국측 요청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94년 때처럼 또다시 미국과 충돌을 불사할지, 이래저래 3월 한 달은 남북한 관계는 물론이고 미·북한 관계 전반에도 중대한 시기인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