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가 떠도는 ‘다케시타 괴담’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1999.05.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케시타 전 총리 입원 둘러싸고 소문 분분…사망·은퇴 때는 큰 타격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는 지난 5월8일 후지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입원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가, 내가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 일본이 전후 미국의 원조 덕택에 부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라고 전화로 귀띔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케시타 전 총리로부터 오랫동안 주위에 대해 인내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배워 왔으나 아직 그런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라고 털어놓았다.

오부치 총리의 ‘오야붕’이자 일본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다케시타 전 총리의 입원이 장기화함에 따라 그의 병명에 대한 갖은 억측이 나돌고, 일본의 정치 1번지 ‘나가타 죠우’에도 큰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다.

다케시타가 입원한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5월5일. 오부치 파벌의 헤이세이 연구소가 그 이틀 뒤 배포한 문서에는 ‘2∼3주 치료하면 곧 퇴원할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병명이 ‘변형성 척추염’이라고 적혀 있었다.

같은 날 열린 오부치파 간부회의에서도 ‘본인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입원한 병원이 알려지면 사람이 몰려들어 혼잡해질 수 있기 때문에 ‘입원한 병원 이름을 공표할 수 없으며, 병문안도 일절 사절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일본 정국에 정변을 일으킬 수도 있는 막강 실력자 다케시타가 돌연히 입원한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언론과 정계 관계자들은 다케시타가 입원한 병원을 백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원은커녕 다케시타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말기 암 환자” “이미 사망” 추측 난무

그래서 다케시타가 사망했다는 괴문서와 함께 다케시타가 말기 암 환자여서 곧 임종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나가타 죠우에 유포되기 시작했다. 정계 최고 실력자가 사망했거나 위독하다는 것은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나가타 죠우 쪽에서 보면 커다란 사건이다.

그래서 튀어나온 것이 오부치 총리의 ‘전화로 귀뜀을 받았다’는 발언이다. 하지만 오부치 총리는 정치 대부 다케시타의 입원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건강히 잘 있다’는 얘기만 할 뿐 더 언급하지 않았다. 후지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일부러 방미 직전에 전화를 받았다고 털어놓은 것은 다케시타가 건재함을 알려 자신의 정치적 위상이 튼튼함을 과시하려는 계산에서다.

5월10일 열린 오부치파의 정치 자금 모금 파티에서 파벌 고문인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총리도 다케시타가 건재하다고 강조했다. “요즈음 다케시타씨가 사망했다는 지독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다케시타씨는 허리가 아파 움직일 수는 없으나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으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잇단 진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다케시타가 정상적으로 퇴원하더라도 75세라는 나이를 감안한다면 그의 정치력이 현저히 쇠퇴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항간에는 그가 곧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는 설도 파다하다.

다케시타의 영향력이 떨어지거나 건강을 이유로 정계를 은퇴할 경우 가장 타격을 입게 되는 사람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정치적 후견인을 잃게 되는 오부치 총리이다. 오부치 총리는 최근 주변에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가 잘하면 다케시타씨의 훈수 덕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다케시타씨의 훈수가 나빴다는 얘기를 듣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덕을 본다.”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오부치 총리는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전화로 다케시타의 의견을 듣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케시타는 직접 지시하지는 않지만 은유적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부치 총리에게는 오는 9월에 치를 자민당 총재 선거가 코앞에 닥친 최대의 난관이다.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현재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전 간사장, 야마사키 다쿠(山崎拓) 전 정조회장, 모리 요시로(森喜朗) 현 간사장이 출마 준비를 하고 있다.

자민당의 현재 분위기로는 오부치 총리의 재선이 결정적이지만, 만약 다케시타가 사망하거나 정계를 은퇴할 경우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건강 악화하면 일본 정가에 큰 변화

우선 자민당 최대 파벌인 오부치파의 결속력이 크게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실질적 리더인 다케시타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경우 파벌 후계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관방장관과, 현재 파벌을 떠나 있는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靜六) 전 관방장관이 ‘다케시타 이후’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당수도 옛 친정인 오부치파의 주도권을 탈환하려 애쓰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파벌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권력 투쟁이 심해지면 자연히 자민당 최대 파벌인 오부치파의 결속력이 약해진다. 최악의 경우 파벌이 분열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오부치 총재가 재선될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비주류인 가토 전 간사장이 총재 선거에서 어부지리를 얻을 수도 있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자민당 내에서 가을께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의견이 대두하고 있다고 한다. 우선 가을이 되면 중의원 의원의 잔여 임기가 1년으로 줄어든다. 제1 야당인 민주당의 인기가 바닥을 기고 있는 것도 중의원을 해산하기에 좋은 여건이다.

이런 호기를 놓치지 않고 올 가을께 임시 국회를 소집해 중의원을 해산한다면 자민당의 대승은 떼놓은 당상이라는 것이 자민당의 분석이다. 그러나 다케시타의 건강이 악화하고 오부치파의 내분이 심해지면 오부치 총리가 해산권을 행사할 겨를이 없어진다.

이렇게 보면 다케시타의 건강 악화나 사망이 한 정치인의 불행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일본 정국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대사건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부 정치 평론가들은 다케시타가 10여 년 전 총리 자리를 내놓은 사람이고, 자신의 정치적 대부였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처럼 직접 파벌을 관장하는 영수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다나카가 뇌일혈로 쓰러졌을 때보다 정계에 미치는 충격이 작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케시타 입원 소식에 나가타 죠우의 정치인들이 모든 안테나를 동원해 그의 병명을 캐고 있고, 일본 언론들이 사망 예정 기사를 미리 만들어 놓고 다케시타 이후의 정국 전개에 취재력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케시타가 ‘헤이세이(平成)의 야미 쇼군(暗將軍)’임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반면 ‘흘러간 물’이나 다름없는 다케시타가 총리 자리를 내놓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데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비판자들은 정책 중심의 정치보다 파벌 중심의 이른바 ‘다케시타류 정치’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 정치가 10년간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최근 10년간 일본을 움직여 온 다케시타류 정치도 그의 건강 악화와 함께 곧 막을 내릴지 모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