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 헤커 박사가 증언한 ''북한 핵무기 진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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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6자 회담 개최 문제가 또 다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미국 민간 대표단의 일원으로 북한 영변의 핵 시설을 둘러본 미국 핵 전문가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미국 국립 로스알라모스 연구소 선임연구원)가 1월 21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했다.

헤커 박사는 이 증언에서 북한의 핵 개발 실상과 관련해 자신이 직접 확인한 것과 확인하지 못한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 밝힘으로써 전문가다운 신중함을 시종 유지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그의 증언 중 플루토늄 재처리 사실만 보도됨으로써 한쪽 측면만 강조되었다. 균형 잡힌 판단을 위해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북한 외무성이 초청했다:나는 이번에 스탠퍼드 대학 존 루이스 교수의 권유로 방북했다. 나와 15년 지기인 루이스 교수는 1987년 이래 북한을 열 차례나 다녀온 아시아 전문가이다. 북한 관리들은 지난해 8월 베이징 6자 회담 직전 북한을 방문했던 그에게 재방북 의사를 타진하면서 영변 핵 시설도 방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알려왔다. 이에 그는 핵과학자인 나에게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북한측 초청 기관은 외무성이다. 우리의 핵 시찰 기간 내내 이 근 대사가 동행했고,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는 따로 세 번 만났다. 영변 핵 시설 방문 외에도 이번 방북 기간에 루이스 교수는 경제·군사·과학 현안과 관련해 다른 모임도 주선했다.

미국 핵과학자 초청은 이례적인 일: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우리의 방문이 북·미 핵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시찰 기간에 우리가 객관적으로 관찰해 주기를 바라며 결론도 우리에게 맡기겠다고 말했다. 김부상은 특히 핵과학자인 나의 방북을 승인한 것이 이례적인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부상은 당초 북한은 평화적 목적을 위해 플루토늄을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미국의 대북한 적대정책이 강화되는 바람에 당초 목적을 바꾸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미국이 북한과 협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한 것은 미국측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또다시 시간을 까먹는 동안 우리의 핵 무기고는 양적 질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부상은 우려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특히 우리의 방북 결과 북한이 진짜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미국이 판단하고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지 우려를 표시했다.

북한이 우리를 초청한 까닭은 2002년 12월 이후 취한 상당한 조처들을 입증해 보이고 우리에게 자신들의 핵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내가 북한을 방문한 이유:나는 북측 초청자들에게 왜 이번 방문에 동참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나는 북한의 핵 계획과 관련된 모호성에 우려를 가져왔다. 일부 모호성이 고의적일지 모른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모호함은 오판으로 이어지기 십상인데, 핵무기 관련 사안일 때 오판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내심 나는 이번에 직접 영변 핵과학연구단지를 방문해서 북한의 핵 상황을 명료히 파악해 보고자 했다.

영변 원자로는 정상 가동 중이었다:2004년 1월8일 목요일 5명으로 이루어진 우리 일행은 영변 핵 단지를 방문했다. 오전 8시30분 숙소를 떠나 10시30분부터 오후 5시15분까지 시찰했고, 숙소에는 7시30분에 돌아왔다.

우리가 확인한 결과 5MW 원자로는 정상 가동 중이었다. 안내를 받아 원자로 통제실로 들어가 보았다. 계기상의 모든 표시와 냉각탑에서 나오는 증기 구름이 원자로가 순조롭게 가동 중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 원자로가 지난해 내내 가동되었는지 여부는 독자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북측 관계자는 우리에게 그 원자로에서 전기와 난방열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원자로를 가지고 플루토늄도 생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상태로 가동될 때 그 원자로를 가지고 매년 폐연료봉 6kg을 생산할 수 있다. 이미 6kg을 확보했을 수 있고, 또 다른 6kg을 생산하기 위해 가동 중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핵연료 성형공장을 방문할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과거 북한의 핵연료 성형공장은 매년 100t씩 우라늄 핵연료를 만드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 공장은 장차 건설될 50MW 원자로의 노심에 장전될 핵연료를 이미 생산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우리는 폐연료봉이 보관되었던 금속 용기가 없어졌거나 또 용기 뚜껑이 열려 있는 것 등을 보고 폐연료봉이 수조 안에 없음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수조 안에 있던 금속 용기 하나를 임의로 꺼내 열어보았으나 폐연료봉은 없었다. 북측이 폐연료봉 8천개 모두를 다른 저장소로 옮겼을 법도 하지만 그 경우 심각한 안전상의 위험이 따른다. 나는 방사화학실험실로 옮겨지기에 앞서 폐연료봉을 보관하도록 되어 있는 건조 저장소를 방문해도 되느냐고 물었지만, 그 건물에는 아무런 활동도 없으며 또 일꾼도 없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플루토늄인지 단정할 수 없어:북측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은 2003년 1월 중순부터 6월 말까지 폐연료봉 8천개에 대한 재처리를 끝냈다. 4교대로 하루 6시간씩 작업했다고 한다. 이곳의 재처리 능력은 연간 110t인데 재처리 대상 폐연료봉은 50t이어서 6개월도 채 안 되어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설이 산업적 규모의 재처리 시설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했다. 북측은 플루토늄 추출을 위해 표준 퓨렉스(PUREX)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고, 재처리와 관련한 우리의 모든 질문에 척척 대답했다. 그러나 최종 플루토늄 정제와 생산에 사용되는 글로브 박스(glove box:방사성 물질 등을 다루기 위한 밀폐 투명 용기)를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북측 설명으로 미루어 보건대, 북한은 이미 플루토늄 생산에 필요한 글로브 박스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가 핵사찰을 시작하기 전 북한이 이미 관련 실험을 했음을 말해준다.

글로브 박스를 볼 수 없게 되자 북측은 가장 최근에 재처리 과정을 통해 추출한 플루토늄 ‘제품’을 가져왔다. 북측이 가져온 금속 상자 안에는 플루토늄 옥살산 분말 150g이 든 나무 상자와 플루토늄 200g이 든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내가 플루토늄 밀도에 대해 묻자 북측 관계자는 입방 센티미터(㎤)당 15∼16g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장갑을 끼고 직접 유리병을 만져 그 속에 든 플루토늄의 밀도와 열량을 느껴보고자 했다. 유리병은 비교적 무거웠고 미지근했다.

그러나 이런 초보적 방법으로는 문제의 금속과 분말이 플루토늄인지 단정할 수는 없었다. 설령 문제의 ‘제품’이 플루토늄이라 해도 정교한 동위원소 측정을 통하지 않고는 그것이 최근의 재처리 과정을 통해 생산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북한은 과연 핵 억지력을 갖고 있는가?:핵 시설 시찰이 끝난 뒤 우리는 이 근 대사와 김계관 부상을 다시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대사는 우리에게 북한이 핵 억지력을 갖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만일 북한이 주장하는 핵 억지력이 핵 기폭장치나 핵무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번 시찰을 통해 그것을 판단할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들에게 핵 억지력이 성립하려면 첫째는 플루토늄 금속을 만들 수 있어야하고, 두 번째는 핵 장치를 설계하고 만들 수 있어야 하며, 세 번째는 핵 장치를 운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영변에서 본 것은 북한이 분명 첫 번째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북한이 핵 기폭장치를 설계할 능력이 있는지 판단하게 할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또한 북한의 핵 운반 능력 보유 여부를 판단할 수도 없었다. 북한을 떠나기 전날 아침 일찍 나는 이 근 대사에게 핵 억지력과 관련해 좀더 상세히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볼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날 저녁 그런 만남을 주선하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답변했다.

“고농축 우라늄 계획은 없다”:북한 외무성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북한이 2002년 10월4일 시인한 것으로 알려진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논란의 핵심은 북한이 당시 미국 관리들과 만난 자리에서 농축 우라늄 계획을 갖고 있다고 시인했는지 여부다. 그동안 북측 관리들이 자신들이 말했다고 믿는 내용과 미국 관리들이 들었다고 믿는 내용 사이에 상당한 불일치가 있어왔다. 북한 관리들은 이번에 우리에게 당시 강석주 외무성 부상이 행한 관련 발언에 대한 조선말 사본을 제공했다.

우리측 일행인 잭 프리처드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북한이 가지고 있는지 질문하자 김계관 부상은 이에 대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추가 질문이 이어지자 그는 북한은 핵 억지력을 위해 플루토늄(폭탄)의 길을 택했으며,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위해서는 어떤 시설도, 장비도, 과학자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진지하다. (이에 관한) 기술적인 회담에 전적으로 응할 준비가 돼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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