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쳐야 통일된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9.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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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접촉 사고’ 많을수록 정부 접촉 가능성 커져 … 당국자간 ‘개입 장치’ 필요
지난 3월31일 인도양 스리랑카 인근 공해에서 북한 선박 만폭호가 한국의 현대듀크호와 충돌해 침몰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서울 무교동에 자리잡은 현대상선 사옥에는 비상이 걸렸다. 현대상선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악재 중의 악재였다.

사고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고 당시 현대듀크호는 항로 유지선을 따라 운항 중이었고, 만폭호는 상대방 선박을 피해야 할 피항 항로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첨단 레이더 장비와 각종 위험 회피 수단으로 무장한 현대식 선박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고였다. 확률상으로도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공해를 운항하는 하고많은 선박 중에서 남북한 배끼리 마주치기도 어려운데, 그것도 하필이면 금강산 관광 유람선 운항 사업자인 현대상선 배가 북한 배와 충돌하는 사고가 생겼으니 현대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현대가 가장 걱정한 것은 이번 사고가 금강산 관광 및 개발 사업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북한이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불만을 표시할 경우 금강산 사업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는 북한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현재 아태평화위원회를 내세워 금강산 사업을 도맡고 있는 (주)아산과 직접 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손해 배상 책임 문제와 관련해 현대상선 및 주식회사 아산, 북한 아태평화위를 당사자로 한 실무 접촉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현대상선의 관계자도 “아태측이 현대(아산)와의 직접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의도는 만폭호가 보험에 들지 않았거나 P&I 클럽 보상액보다 더 많은 보상을 얻어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금강산 관광 사고는 ‘필연’일 수도

선박 사고가 발생하면 국제 선박회사들의 공제조합인 P&I 클럽(국제선주상호책임보험)이 사고 원인과 피해를 조사한 뒤 과실 비율을 산정해 보상액을 결정하는 것이 국제 관행이다. 그런데 앞서의 현대상선 관계자 말에 따르면, 그동안 보도된 것과는 달리 만폭호가 보험에 들지 않았거나, 보험에 들었더라도 보험료를 내지 않은 무자격 선박이거나, 아니면 북한측이 P&I 클럽이 산정할 보상금보다 더 많은 보상을 얻어내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북한측이 ‘떼’를 쓸 경우 피해 보상 문제가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고는 남북한이 상호 국제법을 적용받는 주권 국가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이중적 기준이 적용되는 특수 관계임을 새삼 드러내 준다. 또 이번 사고는 그야말로 ‘우연한 사고’였지만 남북한 사이에서는 ‘필연적인 사고’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대중 정부 대북 정책의 최대 성과로 인정받는 금강산 관광이다.

98년 한 해 동안 북한을 방문한 인원은 1만3천 8백71명. 이 중 일반 방북자는 3천3백17명이고, 금강산 관광객이 1만5백54명이다. 이 인원은 정부가 89년 일반인 방북을 공식 허용한 이후 97년까지 9년간 방북한 2천4백8명의 5.8배에 달하고, 97년 방북자 1천15명의 13.7배에 이르는 수치이다. 98년 남북간 선박 운항 횟수도 6백2회(편도 기준)로, 전년에 비해 68.6%나 늘어났다. 두 말할 것 없이 작년 11월18일부터 시작한 금강산 관광의 결과이다.

현대는 5월14일부터 금강산 뱃길에 유람선 한 척을 더 투입한다. 그럴 경우 올해 안에 금강산 관광객은 10만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고성항 해상 호텔과 스키장도 건립된다. 이는 금강산 관광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확률상 듀크호 사고가 ‘우연’이라면 금강산 관광 중에 일어나는 사고는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금강산 관광 사업의 주체인 현대와 정부가 가장 고민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더 많은 접촉, 더 많은 교류, 더 많은 협력’을 내건 금강산 관광 사업이 상황 여건에 따라서는 자칫 ‘더 많은 사고, 더 많은 억류, 더 많은 불화’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람선에서 살인 사건 터지면 누가 수사하나

예상되는 시나리오 상의 유형은 크게 나누어 일반 분쟁 상황과 긴급 구난 상황이다. 이 중 관광 도중 발생하는 일반 분쟁의 경우, 사업 주체인 현대와 아태평화위가 30일 내에 협상해 해결하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베이징에 있는 국제경제무역중재위원회 중재를 통해 해결키로 합의했다. 또 남북한은 관광객 신변 안전 및 긴급 구난 상황에 대비해 △금강산 관광을 위한 부속 계약서(98년 7월6일) 상의 ‘신변 안전과 편의 및 무사 귀환’ 보장 △북한 사회안전상 명의의 신변 안전보장 각서(98년 7월9일) △공동 해난 구조를 위한 합의서(98년 8월14일) △긴급 정황 처리에 관한 부속 합의서(98년 10월16일)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또 이같은 ‘안전 장치’를 토대로 정부는 지난해 12월 통일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해양수산부·해양경찰청 등 8개 관계 부처 실국장과 현대상선 크루즈부장을 위원으로 한 ‘금강산 관광선의 안전 운항 및 해난구조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문제는 합의서나 계약서가 당국자가 아닌 한국측 사업자(현대그룹)와 북한측 사업자 또는 아태평화위 명의로 되어 있는 점이다. 또 남북한은 공동 해난 구조를 위한 합의서에서 관광선 비상 사태 때에 공동 해난 구조 지역을 지정하고 ‘비무장 공동 해난구조대’를 편성하기로 합의해 한국 해군 및 해경 함정이 북한 영해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북한은 ‘비무장’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통상 군함은 운항 지역 국가나 정박 국가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불가침 권한을 국제 협약에서 부여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보장하는 법적 제도화 장치와 남북 대화 채널 상설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금강산 관광 사업은 현재 관광객의 신변 안전과 관광선 안전 운항 측면에서 큰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현대상선 박진평 크루즈 운항부장은 “금강산 관광객이 3만명을 넘어섰지만 아무런 사고나 분규가 없었다. 타이태닉호 때만 해도 위험에 대비한 리스크 분산 용량이 70%였으나 현대식 유람선은 기본적으로 150%가 넘게 설계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금강산 유람선이 정박하는 장전항은 북한의 법 질서가 지배하는 지역이다. 사소한 분쟁은 현대와 북한 간에 해결할 수 있지만, 문제가 커지거나 남북 관계가 악화하면 북한의 민·형법이 바로 적용될 수 있다. 이를테면 굳이 남북한 주민 사이의 형사 사건이 아니더라도 정박한 배 안에서 살인 사건이 나면 북한 수사 당국이 개입하거나 용의자 검거를 이유로 관광선을 억류할 수 있다. 물론 그럴 경우 남북한 수사기관 등 당국자간 접촉이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사고가 잦을수록 당국간 접촉(개입)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83년 중국 민항기 춘천 불시착 사건(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은 사고가 국제 관계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대표적 사례이다.

따라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자동 개입’ 장치가 더 긴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장희 교수(외국어대·국제법)는 “김대중 정부가 정책은 전향적으로 앞서가는데 법적 제도화는 미진하다”라고 전제하고, 돌발 사고 등을 상세히 규정한 동서독의 통행협정(71년 체결)처럼 양국 당국자 간의 보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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